「향교암과 처사 박응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1234
한자 鄕校巖-處士朴應天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영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곽현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2010년 - 「향교암과 처사 박응천」 한국학술정보에서 간행한 『내고향의 전설: 경북군 편』에 수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2011년 - 「향교암과 처사 박응천」 영덕문화원에서 간행한 『병곡면지』에 수록
관련 지명 영해향교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예주8길 14-5 지도보기
성격 설화|인물 전설
주요 등장 인물 박응천
모티프 유형 지명 유래담|인물담

[정의]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영리 등운산향교암이라고 불리는 바위굴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향교암과 처사 박응천」은 영덕군 병곡면 영리 등운산에 있는 바위굴이 향교암(鄕校岩)이라고 불리게 된 유래를 설명하는 이야기이다. 향교암은 선비 박응천(朴應天)이 피난하던 곳이다. 박응천영해박씨(寧海朴氏)로서 고려시대에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낸 박세통[미상~미상]의 후손이다.

[채록/수집 상황]

2010년 한국학술정보에서 간행한 『내고향의 전설: 경북군 편』에 실려 있다.

2011년 영덕문화원에서 간행한 『병곡면지』에 수록되어 있는데, 채록 경위는 밝혀져 있지 않다.

[내용]

임진왜란 때의 일이다. 외적이 침입하여 영해로 들이닥치자 당시 향교 장의(葬儀)였던 박응천이 오성(五星)의 위패(位牌)를 안고 등운산에 있는 바위굴로 갔다. 박응천은 오성의 위패를 바위굴에 모시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하였다. 난(亂)이 평정된 뒤, 다른 지방에는 향교가 타버리고 위패가 없어 오성의 위패를 다시 만들었다. 그러나 영해는 박응천의 지극한 정성으로 별 탈 없이 오성의 위패를 고이 모실 수 있었다. 이 일이 있고 난 뒤에 영해 지역 유림에서는 박응천을 길이 칭송하기 위해 이 바위굴에 단을 쌓고, 이 바위의 이름을 '향교암'이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모티프 분석]

「향교암과 처사 박응천」의 주요 모티프는 ‘향교암 이름의 유래’, ‘선비 박응천이 위패를 모신 바위굴’ 등이다. 또한 「향교암과 처사 박응천」은 실존 인물인 박응천의 일화를 담은 인물담이다. 박응천영해박씨로 신라의 충신 박제상(朴堤上)[363~419]과 고려의 문하시중평장사를 지낸 박세통의 후손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박응천이 장의로 있던 향교는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있는 영해향교를 말한다. 다른 지방의 향교와 위패는 타버렸지만 박응천의 지극정성으로 영해향교의 위패는 무사하였다는 내용을 통해 선비 박응천과 영해 지역 유림의 덕행을 칭송하는 이야기인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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