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300783
한자 辛明七
영어공식명칭 Shin Myungchil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강원도 영월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엄찬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4년연표보기 - 신명칠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8년 9월 - 신명칠 충청북도 단양군과 경상북도 영주시 일대에서 항일투쟁 전개
활동 시기/일시 1910년 4월 29일 - 신명칠 공주지방재판소 청주지부에서 징역 5년형 언도
추모 시기/일시 2013년연표보기 - 신명칠 대통령표창 추서
출생지 상동읍 -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 지도보기
활동지 단양 - 충청북도 단양군
활동지 영주 - 충청북도 영주시

[정의]

개항기 강원도 영월 출신의 의병.

[개설]

신명칠(辛明七)[1874~?]은 1874년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났다. 구한말 일제 침략에 저항하여 항일 의병 항쟁을 전개하였다.

[활동 사항]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고종 황제는 을사늑약의 무효화를 청원하기 위하여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일제는 이를 빌미로 1907년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켰고, 순종 황제를 즉위시킨 후 한일신협약을 체결하였다. 한일신협약으로 대한제국의 통치권이 대부분 통감부로 넘어가고 부속 협약에 의하여 군대마저 해산되자, 해산 군인들이 의병에 참여하며 정미의병이 전국적으로 거세게 일어났다. 당시 신명칠도 의병 항쟁에 동참하였다.

신명칠은 1908년 9월 김상태(金相台) 의진 소모장이었던 조병언(趙秉彦) 휘하에서 양총 1정과 탄환 7발을 받아 포군이 되었다. 이후 25명의 부대원들과 함께 지금의 충청북도 단양군과 경상북도 영주시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일제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신명칠은 1910년 4월 29일 공주지방재판소 청주지부에서 폭동 혐의로 징역 5년형을 언도받았고, 이에 불복하여 공소하였으나 1910년 5월 21일 경성공소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었다. 1910년 6월 17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또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신명칠의 공적을 기려 201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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