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광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300819
한자 洪光汝
영어공식명칭 Hong Kwangyeo
이칭/별칭 홍관여(洪寬汝),홍관기(洪寬基),홍국관(洪國觀)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강원도 영월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엄찬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2년연표보기 - 홍광여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8년 8월 7일 - 홍광여 영월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 시기/일시 1908년 8월 13일 - 홍광여 일제 경찰에게 체포
활동 시기/일시 1908년 9월 7일 - 홍광여 징역 15년형 언도
몰년 시기/일시 1951년 12월 10일연표보기 - 홍광여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15년연표보기 - 홍광여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출생지 주천리 -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주천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영월 - 강원도 영월군
활동지 영월 - 강원도 영월군
성격 의병
성별 남성

[정의]

개항기 강원도 영월 출신의 의병

[개설]

홍광여(洪光汝)[1882~1951]는 1882년(고종 19) 지금의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주천리에서 태어났다. 정미의병 시기 영월 지역에서 항일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홍관여(洪寬汝)·홍관기(洪寬基)·홍국관(洪國觀)으로도 알려졌다.

[활동 사항]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고종 황제는 을사늑약의 무효화를 청원하기 위하여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일제는 이를 빌미로 1907년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켰고, 순종 황제를 즉위시킨 후 한일신협약을 체결하였다. 한일신협약으로 대한제국의 통치권이 대부분 통감부로 넘어가고 부속 협약에 의하여 군대마저 해산당하자, 해산 군인들이 의병에 참여하며 정미의병이 전국적으로 거세게 일어났다. 당시 홍광여곽양일(郭良一)·서병순(徐丙順)·김춘일(金春一)·김수동(金水東)·정기옥(鄭琦玉) 등과 함께 영월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에 참여하였다.

홍광여는 1908년 8월 7일 동지들과 함께 영월군 우변면[현 주천면] 가오개리(加五介里)에서 잡화상 이준용(李俊用)으로부터 군자금 240원과 군수물자 12점을 모집하여 거안리(巨安里)로 이동하였다. 이후 홍광여는 제천경찰서에서 파견된 일본인 순사 3명과 한국인 순사 2명에게 8월 13일 체포되었고, 1908년 9월 30일 이른바 강도죄로 징역 15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홍광여는 1951년 12월 10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홍광여의 공적을 기려 201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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