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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산해녀의 대모 강호경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C030205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종길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에 사는 강호경은 본인의 이름보다는 아들 이름인 ‘태연이 어망’이나 ‘해녀집 할머니’로 통한다. 성산 일출봉으로 유명한 서귀포시 성산면 시흥리 출신이다. 일제시대에 태어나 친정어머니는 오빠들 공부 때문에 일본에서 살았고 집에서 자신은 아버지와 함께 산 것으로 기억한다.

집안 형편이 좋은 편이어서 생활의 어려움은 별로 느끼지 못하고 살았는데, 1948년 제주4·3사건 때문에 17세에 이웃집에 사는 동갑내기와 결혼을 하였다. 당시에는 한라산 부근에 숨어 있던 야산대가 마을에 오면 결혼하지 않은 젊은 사람들을 데려가 버렸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조혼을 하였다.

결혼을 하자 남편과 함께 부산으로 나왔는데, 제주에서 나올 때 쌀 두 가마와 함께 여윳돈을 들고 나왔다. 부산에서는 영도다리 부근에서 살았다. 부산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군 부대에 일자리가 생겨 생활은 더 여유가 있었지만 얼마가지 못했다. 전쟁이 난 해에 직장을 나간 남편이 돌아오지 않고 며칠이 지나서야 군대에 징집된 것을 알았다. 제주도로 훈련을 받으러 가면서 편지가 와서야 알게 되었던 것이다.

훈련이 끝나고 부대 배치가 되자 면회가 가능했다. 결혼했다 하여 좋은 상사가 외박을 허락해 주었는데 이때 애가 생겼다. 혼자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처지가 되자 지금의 여수시 돌산읍 금성리 작금마을에 결혼해 살던 언니 집을 드나들면서 장사를 시작했다. 작금마을에서 해산물을 사다가 부산에 팔고 부산에서는 비로도(벨벳)를 사서 여수와 돌산에서 팔았는데 장사가 잘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올 줄 알았던 남편은 전쟁이 끝나고 한참 지난 뒤에 제대 날짜를 받아 놓고 사고로 죽었다.

여러 차례 면회 갈 때마다 생겨난 아이가 셋이나 되었는데 나이는 23세밖에 되지 않을 때였다. 생계를 위해 장사를 다녔던 작금마을의 언니 집으로 와서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작금을 비롯한 돌산 남부 지역은 전복이나 소라 등 패류와 돌미역 등 해조류가 많아서 해녀를 하면 돈이 되겠다 싶어 제주도에서 절로 익혔던 해녀를 하게 되었다.

어패류는 많지만 채취하는 사람이 적어서 아쉬움이 많았다. 사업을 확장하겠다는 욕심에 용기를 내서 제주도로 갔다. 15명이나 되는 해녀를 데려와서 이들을 고용하였다. 아직 해녀일이 서투른 사람이 많아 직접 해녀 일을 하면서 물질을 가르치기도 했다. 해녀를 데려오는 데는 적게는 10만 원에서 100만 원대까지 전도금을 주었는데, 어장이 좋아서 1~2개월이면 갚을 수 있었다. 서른한 살이 되자 큰아들이 배를 부릴 수 있어 남의 배를 임대하지 않아도 되어 처지가 좋아졌다.

해녀들과의 일은 아들에게 맡기고 부산에다 전복을 도매하는 사업을 벌였다. 당시 전복 값은 여수에서 팔면 1㎏에 5만 원대였지만 부산으로 가면 8~9만 원을 받을 수 있었다. 보통 보름에 한번 부산으로 갈 때면 100~150㎏의 전복을 가져다 팔고 비로도 옷감을 여수나 돌산으로 가져와 팔았다. 아침에 부산으로 가는 여일호를 타면 저녁에 자갈치에 넘길 수 있었고 저녁 배를 다시 타고 돌아오면 배에서 잠을 자고 아침 8시에 여수에 도착했다. 당시 부산으로 가던 여객선에 사촌동생의 남편이 타고 있어 많은 도움을 받았다.

여수에 오면 돌산으로 돌아오기 전에 뱃머리약국에 들려 영양제 주사를 사오는 일도 반복되었다. 해녀 일을 오래하면 잠수병에 시달리게 되어 영양제를 맞아야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보름에 한 번 돌아올 적마다 여러 병의 영양제를 사오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이렇게 68세가 되도록 일을 하였다. 제주도에서 일하러 왔던 많은 해녀들은 소개나 연애로 결혼하여 돌산 지역에 뿌리를 내렸다. 뿌리를 내린 제주 출신 해녀들은 계를 조직하고 모임을 만들면서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상부상조하는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고향 사람들이다보니 상호간의 위계질서도 엄정한 편이다.

전쟁의 상처로 남편을 잃고 좌절하지 않고 꿋꿋한 삶을 개척한 강호경의 사례를 보면 제주 사람의 강한 기질과 함께 지혜로움을 엿볼 수 있다. 지금 돌산에는 30여 명의 해녀들이 있는데, 대부분이 강호경의 사업으로 인해서 돌산도에 정착한 사람들이다. 강호경을 돌산해녀의 대모라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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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 대모 강호경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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