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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00613
한자 柳命天
영어음역 Ryu Myeongcheon
이칭/별칭 류명천,사원(士元),퇴당(退堂),청헌(菁軒)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안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근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생년 1633년연표보기
몰년 1705년연표보기
본관 진주
대표관직 판중추부사

[정의]

조선 후기 안산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사원(士元), 호는 퇴당(退堂)·청헌(菁軒). 아버지는 사성(司成) 유영(柳潁), 어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 이윤신(李潤身)의 딸이며, 처는 고령신씨(高靈申氏) 신기한(申起漢)의 딸과 한양조씨(漢陽趙氏) 조송년(趙松年)의 딸이다. 양부는 강원도관찰사 유석(柳碩), 양모는 광주이씨(廣州李氏)로 이정겸(李廷謙)의 딸이다. 형은 이조참판을 지낸 유명견(柳命堅), 동생은 이조판서를 지낸 유명현(柳命賢)이다. 후사가 없어 동생 유명현의 장남을 입양하였다.

[활동사항]

유명천은 1651년(효종 2)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남인 계열이라 출사하지 못하다가 1672년(현종 13) 이조판서 이경억(李慶億)의 천거로 효릉참봉(孝陵參奉)을 지냈다. 이 해 10월 별시문과에 갑과로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전적에 제수된 후 사헌부감찰을 거쳐, 1673년 예조좌랑, 병조좌랑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만경현령(萬頃縣令)을 역임하였다.

1674년 다시 병조좌랑으로 있다가 곧 병조정랑으로 승진되었고 그 뒤 홍문관교리, 홍문관헌납을 지냈다. 1676년(숙종 2) 승정원동부승지, 승정원우승지, 장례원판결사, 예조참의, 사간원대사간, 호조참의를 거쳐 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형 유명견이 수찬에, 동생 유명현이 부교리에 재임 중이라 3형제가 홍문관에 있을 수가 없다고 상소하여 사임하였다.

1677년 대사간으로 있을 때 허적(許積)의 의논을 지지하여 송시열(宋時烈)의 처단을 반대하다가 사임하였다. 1680년 이조참판에 재직 중 경신대출척으로 음성에 유배되었다가 1683년 풀려났다. 이후 안산에서 시부(詩賦)와 독서로 소일하던 중 지난날의 옥사가 무고라 하여 1688년 강계부사(江界府使)에 기용되었으나 자형 윤이제(尹以濟)가 평안도관찰사로 재직 중이라 피하고 싶다는 뜻을 올려 사임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정권이 뒤바뀌자 공조판서에 중용되고, 다시 예조판서로 옮겨 홍문관제학을 겸하였다. 그 후 사직서제조, 평시서제조(平市署提調), 전의감제조, 승문원제조를 역임하고 이어 사헌부대사헌, 의정부우참찬겸지의금부사, 이조판서겸내의원제조, 부묘도감당상(祔廟都監堂上)을 역임하였다. 1692년 다시 우참찬을 거쳐 호조판서로 옮겼고, 1693년 사복시제조(司僕寺提調)를 겸하여 경복궁 수리를 주관하고 보국숭록대부에 올랐다.

1693년 11월 판중추부사로서 동지사가 되어 청나라에 갔다가 1694년 3월에 돌아왔다. 같은 해에 갑술옥사가 진행되면서 지난날 김기문 옥사(金起門獄事)에 임금을 오도하였다는 죄로 파직불서용(罷職不敍用)의 명이 내려졌다. 이어 장령 유집일(兪集一), 지평 김시걸(金時傑) 등이 권력을 천단하며 악행과 음모로 백성을 병들게 한다고 상소하였다가 흑산도에 위리안치되었다.

1699년 동궁의 병환이 나은 것을 기념한 사면 때 고향에 돌아가도록 풀려났으나 1701년 장희재(張希載)와 공모하여 인현왕후(仁顯王后)를 모해하려 했다는 지평 이동언(李東彦)의 탄핵을 받고 나주 지도(智島)에 안치되었다. 1704년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 후 1705년 가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

묘소는 충청북도 괴산군 소수면 몽촌리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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