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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421
한자 戊午史禍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박홍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498년 - 무오사화 발생
성격 사화
관련 인물/단체 김일손|유자광|김종직|박한주

[정의]

1498년 신진 사림들이 훈구파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

[개설]

무오사화 는 1498년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제자이던 김일손(金馹孫)[1464∼1498] 등 영남 사림들이 유자광(柳子光)[?∼1512]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이다. 4대 사화 중에서 첫 번째로 일어난 사화이며, 사초(史草) 문제로 발단되었기에 무오사화(戊午史禍)라고 한다.

[역사적 배경]

조선 성종(成宗) 때 유교 문화가 성숙하면서 사림들을 등용하자, 기성 세력인 훈구파에게는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신구 대립은 사상적·정치적인 이념의 차이나 감정적인 반목도 있었지만, 현실적인 사회 모순의 필연적인 귀결이라는 측면도 있었다.

[경과]

청도 출신 김일손이 사관으로 재직하던 중에 스승인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 등을 사초에 올린 것이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발각되었고, 이를 계기로 유자광세조(世祖)의 신임을 받았던 노사신(盧思愼)·윤필상(尹弼商) 등과 모의하여 사화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신진 사림의 거두 김종직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김일손·권오복 등을 능지처참하는 등 많은 사림들을 처벌하였다.

[결과]

무오사화 로 청도를 대표하던 선비 김일손이 한양으로 압송되어 능지처참을 당하였고, 연산군(燕山君)에게 미움을 받던 청도 출신 박한주(朴漢柱)[1459∼1504]가 평안도 벽동(碧潼)에 장배(杖配)되었다. 한편 사림의 핵심이던 이주(李胄)[1468∼1504]가 진도에 유배되면서 이주의 형 이윤[당시 청도 군수]도 유배되었다. 이 시기에 이주의 아우이던 이육(李育)이 지금의 청도군 화양읍 유등리에 은거함으로써 철성 이씨(鐵城李氏) 청도 입향조가 되었다. 청도 사족을 대표하던 김해 김씨(金海金氏)밀양 박씨(密陽朴氏) 일원들도 사화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되면서 중앙 정계에 미련을 버리고 처사형 학자로 길을 걷는 계기가 되었다.

[의의와 평가]

무오사화 로 수많은 신진 사림들이 희생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사기도 크게 위축되었다. 이후로도 신진 사림들은 큰 사화를 여러 차례 더 겪었다. 그러나 청도 사림은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잠재적인 성장을 계속해 나갔는데, 고을 선비 김대유(金大有), 박하담(朴河淡), 박하징(朴河澄) 등과 같은 처사형 학자들이 청도의 사림을 영도하면서 다음 세대를 연결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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