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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965
한자 李胤
이칭/별칭 자백(子伯),쌍매당(雙梅堂)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박홍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62년연표보기 - 이윤 출생
활동 시기/일시 1486년 - 이윤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488년 - 이윤 승정원 가주서 역임
활동 시기/일시 1496년 - 이윤 사헌부 지평 역임
활동 시기/일시 1498년 - 이윤 대사간 역임
활동 시기/일시 1498년 - 이윤 무오사화로 거제로 유배
활동 시기/일시 1500년 - 이윤 해배됨
활동 시기/일시 1506년 - 이윤 중종반정으로 관직에 복귀, 홍문관 응교 역임
활동 시기/일시 1510년 - 이윤 성절사 일행으로 중국에 감
거주|이주지 이윤 낙향지 -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유배|이배지 이윤 유배지 - 경상남도 거제시
묘소|단소 이윤 묘재 옥천재 -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고성
대표 관직 대사간

[정의]

조선 전기에 청도 군수를 지낸 문신.

[개설]

이윤은 1486년(성종 17)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승정원 가주서를 거쳐 사헌부 지평·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 무오사화 때 거제로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으로 다시 관직에 들어와 홍문관 응교·전한 등을 거쳤다. 부제학으로 있을 때에는 13조목의 국가 시책을 올려 아첨하는 무리를 멀리하고 학풍을 바로잡을 것을 진언하였다.

[가계]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자백(子伯), 호는 쌍매당(雙梅堂). 아버지는 사온서 영(司醞署令)을 지내고 도승지에 추증된 이평(李泙)이고, 어머니는 군사(郡事) 허추(許樞)의 딸로 양천 허씨(陽川許氏)이다. 고성 이씨 청도 입향조 이육(李育)의 형이다.

[활동 상황]

이윤(李胤)[1462∼?]은 1483년(성종 14) 성균관 유생으로 있을 적에, 조정에서 궁궐을 보수하는 역사에 승려들을 동원하고 도첩(度牒)을 지급하려는 계획을 세우자 정여창(鄭汝昌)과 함께 반대했다. 1484년에 승려들이 성균관 유생을 구타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엄벌에 처해 달라고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다. \1486년(성종 17)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1488년 승정원 가주서를 지냈으며, 1496년(연산군 2)에는 사헌부 지평을 역임했다. 1498년(연산군 4)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 당시는 연산군이 임금으로 있을 때였는데 정국이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윤은 자신에게 해가 돌아올 것을 무릅쓰고 대간의 직책을 다하다가 무오사화가 일어나 거제로 유배되었다. 2년 뒤인 1500년 진도로 유배되었던 아우 이주(李冑)와 함께 풀려났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다시 관직에 들어와 홍문관 응교·전한 등을 거친 뒤 시강관(侍講官)이 되었다. 이윤은 이때 영의정 유순(柳洵)을 탄핵했다. 1506년 10월 부제학에 임명되었을 때에는 임금에게 ‘신하의 간언을 따르고 아첨하는 무리를 멀리하며 학풍을 바로잡을 것’ 등을 포함한 13조목 국가 시책을 진언했다. 이듬해에는 유자광(柳子光) 일파를 여러 차례에 걸쳐 신랄하게 배척하였다.

1510년 이계맹(李繼孟) 등과 함께 성절사(聖節使)의 일행으로 중국에 가서 명나라의 무종(武宗)에게 환대를 받고 돌아왔다. 한때 노모 봉양을 위하여 청도에 내려와 군수로 재임하면서 청렴함으로 이름을 떨쳤다.

[학문과 저술]

아우 이주와 함께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김일손(金馹孫)·권오복(權五福) 등과 깊이 교유하였으며, 저서로는 시문집 『쌍매당 일고(雙梅堂逸稿)』 1책이 있다. 만년에는 영산(靈山)[경상남도 창녕 지역의 옛 지명] 마고리(麻姑里)에 쌍매당을 짓고 은거하였다.

[상훈과 추모]

묘재인 옥천재(玉泉齋)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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