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1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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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晉州姜氏 |
영어의미역 | Jinju Gang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신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헌규 |
세거지 |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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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시기/연도 | 조선 후기/1790년 경 |
성씨시조 | 강이식(姜以式) |
입향시조 | 강백준(姜百濬) |
[정의]
강이식을 시조로 하고 강백준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칠곡군의 세거성씨.
[연원]
진주강씨(晋州姜氏)의 시조(始祖)는 강이식(姜以式)이다. 강이식은 고구려 영양왕(597년) 때 도원수(都元帥)로 수나라 문제(文帝)가 이끈 30만 수군을 정병 5만으로 대파한 명장이다. 수년 후 수나라 문제(文帝)의 아들 양제(煬帝)가 10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할 때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과 함께 살수대첩으로 승리하였다. 이후 신라 태중대부판내이령 강진(姜縉)이 진양후에 봉해지며 본관을 진주로 하였다. 강씨의 본관은 문헌상으로는 진주, 금천, 안동, 백천, 해미, 동북, 광주 등 7본(本)이다. 모두 진주의 지파로 강씨는 유일본을 내세우고 있어 강이식(姜以式)이 모든 강씨의 도시조(都始祖)가 된다.
[입향경위]
진주강씨 박사공파 강맹경(姜孟卿)의 종질(從姪) 강의정(姜儀貞)이 칠곡에 처음으로 입향하였다. 포산(苞山)[현풍] 곽씨와 결혼한 후 칠곡군 지천면 창평리를 세거지로 정하여 1458년경에 입향하여 살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청송·영천·청도·군위 등지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 사예(士藝) 강백준(姜百濬)이 1740년에 경남 사천에서 출생한 양자 강옥성(姜玉成)을 광주이씨 만각제 이동급(李東汲)의 딸과 혼인하게 하면서 칠곡군 지천면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강백준이 칠곡으로 이주한 시기는 강옥성이 1777년에 출생했으므로 결혼할 연령인 1790년 이후로 추정된다. 칠곡군 지천면 신리에 세거하고 있는 진주강씨는 박사공파(博士公派)·통계공파(通溪公派)·참판공파(參判公派)·영선공파(永善公派) 등의 자손들이다. 영선군 강이찬(姜利纘)은 박사공의 9세손이고 입향조인 강백준은 박사공의 20세손이다. 강백준은 아들이 없어 동생 강백의(姜百懿)의 둘째아들인 강옥성을 양자로 삼았다.
[현황]
강백중이 칠곡으로 이주하기 350여 년 전에 박사공파(博士公派)·통계공파(通溪公派)의 파조인 강의정(姜儀貞)이 칠곡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었다. 청하현감을 지낸 강의정의 자는 효칙(孝則)이고 호는 우락당(憂樂堂)이다. 아들 강지해(姜之海)는 이조참의를 지냈으며 5명의 손자 강효손(姜孝孫)·강계손(姜繼孫)·강충손(姜忠孫)·강신손(姜信孫)·강종손(姜終孫) 모두 급제를 하여 가세(家世)를 떨쳤다. 현재 후손들은 칠곡(漆谷)·영천(永川)·군위·청송·청도 등에 흩어져 살고 있다. 5형제가 살고 있던 상지(上枝)마을 맞은편에 구슬정(九瑟亭)이라는 큰 정자를 짓고 살았다. 강의정의 아들인 강지해(姜之海)의 다섯 아들이 큰 잔치를 베풀고 자신들의 관인(官印)을 마당에 있는 다섯 개의 크고 작은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고 해서, 다섯 개의 바위들을 오인석(五印石)이라고 부른다는 내용이 『칠곡지(漆谷誌)』에 기록되어 있다.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 보고서」에 의하면 2000년 칠곡군에 거주하고 있는 진주강씨는 500여 가구에 1,640여 명이다.
[관련유적]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심천리에 혜사(惠社) 강원형의 추모지소인 혜사정과 신리에 오인석(五印石)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