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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01875
한자 世居姓氏
영어의미역 A Family Name of Residing for Generations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헌규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에 동일한 인물을 시조(始祖)로 하면서 집성 세거한 성씨(姓氏).

[개설]

성(姓)은 혈족 관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으로 이것이 언제부터 발생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미 인류 사회가 시작되는 원시 시대부터 이러한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원시 사회(原始社會)는 혈연을 기초로 하여 모여 사는 집단체로 조직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처음에 모계(母系) 혈연을 중심으로 모여 사는 모계 사회(母系社會)가 나타났다가 뒤에 부계 사회(父系社會)로 전환되었다. 모계 사회건 부계 사회건 조상이 같은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고 모여 살았던 것을 말한다. 우리는 원시 사회를 씨족 사회(氏族社會)라 하고 있다. 씨족 사회도 시대가 흐르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대(代)가 멀어짐에 따라 혈통이 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여 살게 되어 여러 개의 씨족 집단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많은 씨족 집단이 모여 더 큰 사회를 조직하면서 부족 사회(部族社會)로 다시 부족 국가(部族國家)로 부족 연맹으로 조직된 것이 오늘날 사회적·역사학의 상식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인류 사회는 혈연에서 출발하고 혈연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하였기 때문에 원시 시대부터 씨족에 대한 관념이 매우 강하였다. 자기 조상을 숭배하고 동족끼리 서로 사랑하고 씨족의 명예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리고 각 씨족은 다른 씨족과 구별하기 위하여 각기 명칭이 있었을 것이며, 그 명칭은 문자를 사용한 뒤에 성(姓)으로 표현하였다. 동양에 있어서 처음으로 성을 사용한 것은 한자를 발명한 중국이었으며, 처음에는 그들이 거주하는 지명이나 산(山)·강(江)으로 성(姓)을 삼았다. 신농(神農)씨의 어머니가 강수(姜水)에 있었으므로 성을 강씨라 한 것은 이것을 실증하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중국식 한자 성을 쓰기 시작한 것은 중국 문화를 수입한 이후의 일로서 고구려는 장수왕 시대부터 중국에 보내는 국서(國書)에 고씨(高氏)의 성을 썼으며 백제는 근초고왕(近肖古王) 때부터 여씨(餘氏)라 하였다가 무왕(武王) 때부터 부여씨(扶餘氏)라 하였으며, 신라는 진흥왕 시대부터 김씨(金氏) 성(姓)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국민 전체가 성을 사용한 것은 아니고 왕실에서 먼저 사용하고 다음에 귀족 관료층에서 사용하였는데 『삼국사기』 이전의 중국 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있는 삼국의 성을 보면 왕실의 성을 쓴 사람만이 나타나 있고 고구려는 고씨(高氏), 백제는 여씨(餘氏), 신라는 김씨의 성을 가진 사람이 가장 많고 그밖에 고구려는 을(乙)·예(禮)·송(松)·목(穆)·우(于)·주(周)·마(馬)·손(孫)·동(董)·병(苪)·연(淵)·명임(明臨)·을지(乙支) 등 10여종, 백제는 사(沙)·연(燕)·리(刕)·해(解)·진(眞)·국(國)·목(木)·묘(苗)의 8족과 왕(王)·장(張)·사마(司馬)·수미(首彌)·고며(古厼)·흑치(黑齒) 등 10여종, 신라 박(朴)·석(昔)·김(金) 3성과 6부의 이(李)·최(崔)·정(鄭)·손(孫)·배(裵)·벽(薜)의 6성 및 장(張)·요(姚) 등 10여 성(姓)에 불과하다. 신라의 경우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에 성을 쓴 사람은 하나도 없고 또 『삼국사기』에도 성을 쓴 사람보다 쓰지 아니한 사람이 더 많은 것을 보면 귀족·관료들도 다 성을 쓴 것은 아니었다. 주로 중국을 왕래한 사람과 당나라에 유학한 사람, 당나라와 일본에 무역을 한 사람들이 성을 사용하였으며, 일반 민중은 신라 말기까지 성을 쓰지 않았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개국한 뒤 목천(木川) 사람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키므로 태조는 이를 미워하여 우(牛)·마(馬)·상(象)·돈(豚)·장(獐)과 같은 짐승의 뜻을 가진 자로 성을 주었는데 뒤에 우(牛)는 우(于)로, 상(象)은 상(尙)으로, 돈(豚)은 돈(頓)으로, 장(獐)은 장(張)으로 고쳤다는 설이 있다.

고려 초기부터는 성을 쓰는 사람이 많이 나타나 귀족·관료 계급은 성을 쓰지 아니한 사람이 없게 되었다. 고려 중기 1055년(문종 9)에는 성을 붙이지 아니한 사람에게는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주지 않는 법령을 내린 것을 보면, 고려 중기까지도 성을 쓰지 아니한 사람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055년(문종 9)의 이 법령은 우리나라 성의 한 분기점으로 이때부터 성이 보편화되어 일반 민중이 다 성을 갖게 되었다. 우리나라 성씨 중에서도 고려 문종 이후의 사람을 시조로 하는 씨족이 많이 있는데 이것은 문종 이후에 성을 썼기 때문이며 그 때부터 성이 보편화 되었다. 고려 중기 문종 이후 성이 보편화되었으나 노비 등 천인(賤人) 계급에 이르러서는 조선 초기까지도 성을 쓰지 아니하였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당시에 성씨가 265성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도곡총설(陶谷叢說)』에는 298성이 있다고 쓰여 있다. 1776년에 이르러서는 성씨가 486성으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났고, 고종 때 발행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496성이 수록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에 조선인을 위한 성씨 조사에서 250성으로 나타났고, 1934년 중추원에서 펴낸 『조선의 성명 씨족에 대한 연구조사』에는 326성으로 나타나 있다.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 1960년 조사에서 258성이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에서 본관별로 분류하여 실시한 결과 274성으로 확인되었다.

[칠곡의 성씨]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인동현에 살고 있었다는 토착 성씨로 장(張)·유(兪)·유(劉)·심(沈)·고(高)가 나오고, 약목현의 토착 성씨는 이(李)·유(柳)·한(韓)이고 촌성(村姓)으로 김(金), 속성으로 백(白)씨가 있다고 하였다. 성주목의 속현이었던 팔거현에 살았다는 토착 성씨는 도(都)·현(玄)·임(任)의 3성이고, 백성(百性)은 전(全)·변(卞)의 2성이며 내성(來性)은 배(裵)·임(林)의 2개 성이 있다고 하였다. 1530년(중종 25)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인동현에는 장(張)·심(心)·유(兪)·고(高)의 성이 있고, 약목은 이(李)·유(柳)·한(韓)이 있고, 촌성(村性)은 김(金)이며 속성(續性)은 백(白)이다라고 하였다. 성주목의 속현 팔거현에 있다는 성은 도(都)·현(玄)·임(任)·전(田)·변(卞)의 5개 성이고, 내성(內姓)은 배(裵)·임(林)이 있다고 하였다.

1832년(순조 32)에 간행된 『칠곡지』 성씨 조에 의하면, 과거 인동도호부칠곡도호부를 합한 칠곡군에 41성이 등장한다. 도(都)·여(呂)·현(玄)씨 세 성은 본관이 팔거(八莒)이다. 이(李) 본관이 광주(廣州)·이(李) 본관이 벽진(碧珍)·배(裵) 본관이 달성(達城)·정(鄭) 본관이 동래(東萊)·송(宋) 본관이 야로(冶爐)·조(曺) 본관이 창녕(昌寧)·이(李) 본관이 전의(全義)·이(李) 본관이 덕산(德山)·황(黃) 본관이 창원(昌原)·유(柳) 본관이 문화(文化)·윤(尹) 본관이 칠원(漆原)·금(琴) 본관이 봉화(奉化)·김(金) 본관이 광주(光州)·강(姜) 본관이 진주(晉州)·권(權) 본관이 안동(安東)·장(張) 본관이 옥산(玉山)·박(朴) 본관이 순천(順天)·이(李) 본관이 전주(全州)·전(全) 본관이 정선(旌善)·한(韓) 본관이 청주(淸州)·이(李) 본관이 성주(星州)·조(趙) 본관이 한양(漢陽)·장(張) 본관이 창녕(昌寧)·김(金) 본관이 안동(安東)·이(李) 본관이 광주(光州)·이(李) 본관이 합천(陜川)·노(盧) 본관이 안악(安岳)·우(禹) 본관이 단양(丹陽)·양(楊) 본관이 청주(淸州)·김(金) 본관이 삼척(三陟)·최(崔) 본관이 영천(永川)·정(鄭) 본관이 오천(烏川)·심(沈) 본관이 청송(靑松)·김(金) 본관이 문소(聞韶)·배(裵) 본관이 성산(星山)·조(趙) 본관이 함안(咸安)·곽(郭) 본관이 현풍(玄風)·은(殷) 본관이 행주(幸州)·윤(尹) 본관이 파평(坡平)·김(金) 본관이 일선(一善)·차(車) 본관이 연안(延安)·소(蘇) 본관이 진주(晉州)·김(金) 본관이 김해(金海)·임(任) 본관이 풍천(豊川)·김(金) 본관이 김녕(金寧)·홍(洪) 본관이 부계(缶溪)·전(全) 본관이 옥산(玉山)·구(具) 본관이 능성(綾城)이다.

2000년 통계청 인구 조사 자료에 따르면 칠곡의 성씨는 모두 100여종 31,033가구에 100,380명이 살았으며, 당시 통계에 의하면 김해 김씨가 가장 많아 전체의 8.2%에 이르고 칠곡의 10대 성씨를 차례로 보면 김해 김씨 2,530가구에 8,248명, 밀양 박씨 2,023가구에 6507명, 경주 이씨 1,208가구에 4,003명, 인동 장씨 1,218가구에 3,609명, 전주 이씨 1,046가구에 3,315명, 경주 김씨 985가구에 3,220명, 경주 최씨 755가구에 2,527명, 안동 권씨 706가구에 2,272명, 김녕 김씨 693가구에 2,236명, 진주 강씨 505가구에 1,649명 순이며 십대 성씨의 가구 수는 11,027가구 37,586명으로 전체 인구의 37.4%에 달한다.

1832년(순조 32)에 간행된 『칠곡지』에서는 41성이 등장하였는데 2000년의 인구 조사 자료에서 칠곡의 성씨가 모두 100여 성으로 나타난 것은 농경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변화되면서부터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모여들어 집성촌을 형성하지 않고 이주해 온 성씨들의 비중이 크게 변화되어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칠곡지』 2000년 인구 조사에 나타난 성씨들 중 『칠곡지』 성씨 조에는 없던 성씨들은 경주이씨, 경주 최씨, 안동 김씨, 의성 김씨 광산 김씨, 남평 문씨, 순흥 안씨, 김해 허씨, 영일 정씨, 남양 홍씨, 평해 황씨, 창녕 성씨, 밀양 손씨, 청송 심씨, 영천 이씨, 나주 임씨 등 53개 성씨다.

[칠곡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

칠곡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인동 장씨(仁同張氏)를 비롯 3성(도(都)·여(呂)·현(玄))이 있는데, 현재에 도(都)·여(呂)·현(玄)씨의 기록은 없고, 인동 장씨 문중만이 세계를 이어가고 있으며 칠곡군 인동[현 구미시]을 본관으로 하는 인동 장씨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고려 초 삼중대광신호위상장군(三重大匡神虎衛上將軍)을 지낸 장금용(張金用)을 시조(始祖)로 한다. 『여헌수록(旅軒手錄)』에 의하면 상장군(上將軍) 장금용을 인동 장씨의 시조로 삼는 것은 “단지 소급해 올라가 아는 최상의 선조이므로 시조(始祖)라 하는 것이며 그 이상의 조상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라고 하였다. 후손들이 옥산(玉山)[인동의 별호]에 세거하면서 지명에 따라 본관(本貫)을 옥산으로 하다가 신라 경덕왕 때에 수동(壽同)이 인동(仁同)으로 개칭(改稱)됨에 따라 지금은 본관을 인동(仁同)으로 쓰고 있다. 인동 장씨의 계보(系譜)는 고려 초에 인동과 칠곡에 정착한 후 고려 중기에 분파(分派)되기 시작하여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25개 파가 전국 각지로 분파하여 나가고 종통인 중리(中里), 남산(南山), 진가(眞佳), 진평(眞坪), 황상(凰顙) 향리 5개 파가 인동의 본바닥을 지켜 장씨의 연원을 이루었으니 칠곡·선산 지방에 약 6만(1960년)여 호가 살면서 영남의 대성으로 번성했고 전국에 약 70만여 명이 흩어져 살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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