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31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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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미역 | The Reason why Chungju Has Many Fortresse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백종오 |
[개설]
충주를 포함한 중원 지방에는 다른 어떤 지역보다 많은 산성이 분포하고 있다. 이처럼 중원 지방에 산성이 많이 축조된 것은 중원 지방이 한반도의 허리부에 위치하고 있다는 지리적인 중요성에 기인한다. 고대의 고구려·백제·신라는 중원 지방을 장악하기 위해 쟁투를 벌였는데, 중원 지방의 장악은 한반도 지배권의 장악을 의미하고 있었다. 또한 중원 지방은 고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자원인 철이 생산되는 곳이기도 하였다.
특히 한강을 따라 발달된 수로나 소백산맥의 이남과 그 북쪽을 연결하는 육로 등 교통로 상에 위치하고 있는 충주 지역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도 교통의 요지로서의 위상이 높았다. 결국, 충주를 포함한 중원 지방은 철의 생산지라는 중요성과 교통로로서의 중요성으로 국가마다, 시대마다 관심 지역으로 대두되었고 그 결과 많은 산성이 축조되었던 것이다.
[중원과 충주의 지역적 범위]
중원(中原)이란 명칭은 신라 경덕왕이 충주 지역에 두었던 5소경의 하나인 중원경(中原京)에서 연유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중원경(中原京)은 본래 고구려 국원성(國原城)이었는데, 신라가 평정하여 진흥왕이 소경(小京)을 설치하였으며, 문무왕 때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2,592보였다. 경덕왕이 중원경으로 고쳤으며 지금의 충주이다.”는 기록이 있다.
중원경의 치소와 지역적 범위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중원 지방이 충주 지역만 해당되는가 아니면 청주를 포함한 충청북도 전체인가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있으나, 중원문화권의 설정 범위를 어떻게 설정하던지 충주와 그 외곽 지역, 즉 중원 지방은 내륙 문화의 중심지로서 삼국시대의 여러 세력이 교차하던 곳이었으며, 고려시대 이후에도 민족 보전의 핵심적 역할을 해온 역사적 현장이었다.
[산성 축조의 배경, 교통의 요지]
충주는 남한강과 그 지류인 달천 및 요도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는 데, 남쪽으로는 험하고 가파른 소백산맥이 남서쪽으로 뻗어 있고, 북서쪽으로는 차령산맥이 지난다. 산지로 둘러싸인 하천 주변의 충적 지대는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생활하기에 매우 좋은 여건을 제공하였을 것이다.
고구려가 남진하기 이전의 충주 지역은 마한 소국의 영향 하에 있었고, 이후 백제의 영향권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고구려가 국원성을 설치하고 신라 영토인 영남 지방으로의 진출을 꾀하면서 고구려의 남진을 막으려는 신라와 소백산맥을 넘으려는 고구려 간의 진퇴는 거듭되었다. 충주 고구려비(忠州高句麗碑, 국보 제205호)와 단양신라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 국보 제198호)의 존재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중원 지방은 한강 유역을 둘러싼 삼국의 치열한 접전이 이루어진 곳이었다.
특히 충주 고구려비는 고구려와 신라가 친선 관계, 그리고 양국 관계가 악화된 후 백제와 신라가 연합하여 고구려에 대항했던 내용을 전하고 있다. 고구려 장수왕이 한강 상류의 여러 성을 공략하고 고구려의 남쪽 경계이자 남진의 거점인 충주 지역에 비를 세웠다는 점에서 당시 충주 지역을 둘러싼 삼국의 긴박한 상황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 중원 지방은 주요 교통로이자 고구려의 국원성이 있었던 곳으로 도시 기반 시설이 확보되어 있었을 것이며, 고대 국가의 가장 중요한 경제 자원인 철이 생산되는 곳이었으므로 신라는 한강 유역 진출 이후 국원소경 설치를 통해 안정적인 지배를 꾀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1255년(고종 24) 몽고병이 대원령, 즉 계립령을 넘어 충주에서 정예병을 출동시켜 1,000여 명을 격살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여전히 중요한 교통로 상의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계립령 남쪽으로 조령(鳥嶺)[문경새재]이 개척되어 영남대로가 열리면서 충주 지역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되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으로 충주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중원 지방에는 여러 산성이 축조될 수 있었다.
[계립령의 개척과 산성 축조]
현재까지 충주 지방에서 확인된 산성은 모두 13개 소로 봉현성·충주읍성·충주영액·용관동 산성·충주 남산성·탄금대 토성·충주 장미산성·보련산성·대림산성·한훤령 산성·마골점 산성·견학리 토성·문주리 산성 등이다. 이들 산성은 경상북도 문경 지역과 충주를 연결하는 소백산맥의 계립령로 개척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계립령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156년(신라 아달라왕 3)에 개척되었을 만큼 일찍부터 중부 지방과 영남 지방을 연결하는 통로로 이용되었다.
소백산맥이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을 구분하는 분수령으로 양 지역 간의 교류에 장애 요인이 되었기 때문에 해발 1,000m가 넘는 주변 산지에 비하여 현저히 낮은 해발 530m의 계립령은 자연적인 안부(鞍部)를 형성하고 있다. 계립령은 조령이나 죽령보다 고도가 낮고 평탄할 뿐만 아니라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하는 최단 거리에 해당하므로 중요 교통로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소백산맥을 넘은 충주 지역에 위치한 한훤령 산성은 계립령 서쪽을 주 방어선으로 삼아 축조되었는데, 소수의 병력으로도 다수의 적을 방어하기에 적합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가 고구려 세력의 남하를 방어하기 위하여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충주시가지 남쪽에 위치하는 충주 남산성·충주영액·대림산성 등은 충주시가지의 남동쪽을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는 계명산·남산·대림산에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이들 산성은 남북 방향을 모두 방어할 수 있지만, 주로 충주 방면에서 계립령이나 죽령으로 진출하려는 적을 대항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어 신라에 의해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밖에 대소원면에 위치한 견학리 토성, 남한강과 달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탄금대 토성, 중앙탑면의 충주 장미산성, 노은면의 보련산성 등이 있다.
[교통로에 따라 분포되어 있는 산성]
충주 지역의 성곽은 충주에서 사방으로 통하는 교통로를 따라 분포하고 있다. 충주는 동쪽의 계립령과 조령 방면, 서쪽의 주덕~음성 방면, 서북쪽의 장호원~여주 방면, 북쪽의 제천~원주 방면으로 통하는 길목인데, 서쪽에는 견학리 토성, 서북쪽에는 충주 장미산성과 보련산성이 위치하고 있다. 탄금대 토성은 달천과 남한강의 양 수로를 견제하며, 달천 변에 위치한 용관동 산성·대림산성·문주리 산성 등은 괴산 방면을 감제하기에 적합한 위치에 입지하고 있다.
이 중에서 충주 장미산성은 발굴 조사 결과, 백제 또는 그 영향력 하에 있었던 세력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백제-고구려-신라로 이어지는 소속국의 변천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탄금대 토성도 탄금대를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던 철을 생산하던 세력, 즉 백제 혹은 백제의 통제를 받은 지방 세력에 의해 축조되었는데 충주 장미산성의 축조보다 앞선 4세기 중·후반에 축조·경영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처럼 충주 지역에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풍부한 철을 기반으로 한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풍부한 철이야말로 교통로 개척과 아울러 충주 지역이 삼국의 관심 지역으로 대두되는 요인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통일신라시대에 충주 지역은 남쪽으로는 신라 수도인 경주와 북쪽으로는 신라의 남천정(南川停)이었던 이천 등 한강 유역을 연결하던 중요 전략지로서 각광을 받았고, 이러한 인식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지속되었다. 결론적으로 한강을 따라 발달된 수로나 소백산맥의 이남과 그 북쪽을 연결하는 육로 등 교통로 상에 위치하는 충주 지역은 철이라는 가장 강력한 자원을 바탕으로 중원 지방의 중심지로서 발전하였으며, 그 결과 많은 산성의 축조가 요구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