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460 |
---|---|
한자 | 安孟聃 |
이칭/별칭 | 덕수(德壽),양효(良孝)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나종현 |
출생 시기/일시 | 1415년 - 안맹담 생 |
---|---|
혼인 시기/일시 | 1428년 - 안맹담 세종의 딸 정의 공주와 혼인 |
활동 시기/일시 | 1428년 - 안맹담 죽성군에 책봉 |
몰년 시기/일시 | 1462년 - 안맹담 졸 |
묘소|단소 |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 공주 묘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3-1 |
비 | 양효 안공 신도비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3-1 |
성격 | 인척 |
성별 | 남 |
본관 | 죽산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묘가 있는 조선 전기 세종의 사위.
[가계]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덕수(德壽). 증조할아버지 안극인(安克仁)은 고려의 공신으로 중대광 우문관 대제학(重大匡右文館大提學)를 역임하고 죽성군에 봉해진 바 있으며, 문정공(文貞公)에 추서되었다. 안극인의 딸은 공민왕의 비인 정비(定妃)이다. 할아버지 안숙로(安淑老)는 조선 왕조 개창 이후 평양 부윤(平壤府尹)을 지냈으며, 안숙로의 딸은 우왕의 비 현비(賢妃)로 책봉된 바 있다. 아버지 안망지(安望之)는 함흥 부윤(咸興府尹)을 역임하였으며, 봉상시 주부(奉常寺主簿) 허지신(虛之信)의 딸과 혼인하여 안맹담(安孟聃)을 낳았다. 처는 세종의 둘째딸 정의 공주(貞懿公主)이며, 슬하에 4남 2녀가 있다.
[활동 사항]
안맹담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명문가 출신으로, 1428년(세종 10) 정의 공주와 혼인, 부마가 되어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지고 숭정대부(崇政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이 때 할아버지 안숙로와 아버지 안망지는 각각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숭정대부 의정부 찬성(議政府贊成)에 추증되었으며, 할머니 황씨(黃氏)와 어머니 허씨 또한 각각 정부인(貞夫人)과 장신택주(莊信宅主)에 봉해졌다. 세종은 안맹담과 정의 공주의 집에 수차례 이어(移御)하였을 정도로 이들 부부를 아꼈다.
1432년(세종 14)에는 연창군(延昌君)에 봉해졌고, 1442년(세종 24)에 숭록대부(崇祿大夫), 1444년(세종 26)에 관제 개편으로 광덕대부(光德大夫)가 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 종실과 구별하기 위하여 각 부마를 위(尉)라 개칭하기로 하였으므로 이후 연창위(延昌尉)라 불리었다. 1453년(단종 11) 성록대부(成祿大夫), 1457년(세조 3) 수록대부(綏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세조의 즉위에 공을 세워 좌익 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신도비문의 기록에 의하면 1457년 8월에 공신녹권(功臣錄券)을 하사받았다고 하였다. 이로 인해 아버지 안망지는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어머니 허씨에게도 정경 대부인(貞敬大夫人)의 봉호가 더해졌다. 평소 초서에 능하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였으며, 음률(音律)에도 통달하였다고 할 정도로 풍류에 밝았던 것으로 보인다. 남에게 약방을 지어줄 정도로 약물(藥物)에도 해박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불교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1462년(세조 8) 48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이듬해 2월 25일 양주 도봉산 해촌동(海村洞) 묘원에 묻혔다.
[묘소]
방학 사거리에서 우이 계곡 방면으로 방학로를 경유하여 가다가 고갯길이 나오기 직전 도로 우측에 죽산 안씨 묘역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 중 동쪽 묘역에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 공주 묘역이 위치해 있다. 묘는 쌍분 형태로 묘표, 상석, 향로석, 문인석, 장명등 등을 갖추고 있다. 묘표는 비신 전면에 ‘수록대부 연창위 증시 양효공 안맹담지묘(綏祿大夫延昌尉贈諡良孝公安孟聃之墓)’라 새겨져 있다. 묘역 입구에 신도비가 세워져 있는데, 신도비문은 정인지(鄭麟趾)가 지은 것으로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도 수록되었다.
[상훈과 추모]
1455년(세조 1) 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시호는 양효(良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