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7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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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裕寅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류정선 |
[정의]
개항기 현재의 도봉구 지역을 다스렸던 양주 목사.
[활동 사항]
이유인(李裕寅)은 1888년(고종 25) 파주 목사 재임 시 전무위원(電務委員)이 되어 기해 전선(畿海電線) 가설에 공을 세웠다. 1890년에 양주 목사가 되었으며, 양주 목사 재임 시절 조 대비(趙大妃)의 능묘 공사를 끝낸 공으로 경기 감사와 함께 품계가 승격되었다. 1891년 12월 한성부 판윤으로 부임하였고, 1894년 함경남도 관찰사가 되었다.
1896년에 정2품으로 중추원 1등의관, 칙임관 2등에 서임이 되어 1897년에 덕수궁 수리의 임무를 맡았다. 천주교인이었던 이유인은 당시 뮈텔(Mütel, G.C.M.) 주교를 고종에게 소개하여 대한 제국 국호와 광무 연호를 제정하는 데 기여하였다. 1898년 초 법부대신이 되었고 고등재판소장을 겸임하였는데, 김홍륙 사건(事件)[역관 김홍륙(金鴻陸)이 일으킨 고종 독살 사건]을 처리하는 데 고종의 전교(傳敎)를 사칭한 죄로 1898년 9월 10년 유배형에 처하여졌다. 1899년에 사면 복직되었으며, 같은 해 중추원 의관·경무사를 거쳐 궁내부 특진관이 되었다.
1900년 을미사변을 일으킨 일본을 규탄하는 시무 15조를 고종에게 올렸다. 같은 해 평리원 재판장 임시서리가 되어 을미사변과 연루된 안경수(安駉壽)·권형진(權瀅鎭)을 왕에게 보고하지 않고 교형(絞刑)에 처한 죄로 철도(鐵島)에 유배되었다. 1900년 7월 유배에서 풀려났으며, 이듬해 2월 경상북도 관찰사에 복직되었다. 1902년 중추원 의관을 거쳐 시종원경·궁내부 특진관을 지냈고, 같은 해 6월에 재차 평리원 재판장 임시서리가 되었다. 1902년 말에 탁지부 대신 임시서리에 제수되었으며, 이후 한성부 판윤·시종원경·경무사 등을 두루 역임한 뒤, 1904년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다.
1904년 애국 계몽 운동 단체인 보안회(輔安會)를 조직, 부회장으로서 일제의 황무지 개간 요구를 저지하였다. 이후 궁내부 특진관·시종원경을 역임하였다. 1905년 친일 단체인 일진회의 해산을 요구한 공진회 사건(共進會事件)에 연루되어 구속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묘소]
충청북도 충주시 앙성면 용대리에 묘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