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3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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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近代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류정선 |
[정의]
개항기인 1876년부터 1945년 광복 이전까지 서울특별시 도봉구의 역사.
[정치·행정]
1. 행정 구역의 변천
조선 시대 초부터 1895년에 이르기까지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지역은 경기도 양주목(楊州牧) 해등촌면(海等村面)에 해당하였다. 1895년 을미개혁을 단행하면서 지방 제도를 본격적으로 개혁하였다. 1895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를 발포하여 종래의 8도제(道制)를 23부제(府制)로 고치고, 도 아래의 부(府)·목(牧)·군(郡)·현(縣) 등 다양하고 복잡하게 편제되어 있던 지방 행정 조직 체계를 군(郡)으로 통일시켰다. 전국 337개의 군이 23개 부에 소속됨에 따라 양주목은 양주군이 되어 한성부(漢城府) 소속이 되었다.
그러나 전격적인 지방 제도 개혁이 거센 저항을 받게 되자 조선 정부는 1년 후인 1986년 8월 4일에 이전 제도와 유사한 1부(府) 13도제(道制)로 변경하였다. 이에 따라 양주군 해등촌면은 다시 경기도에 속하게 되었으며, 이 지방 행정 조직 체계는 1914년까지 유지되었다.
한일 병합 이후 일제는 지방에 대한 지배를 확립하고 근대적인 행정 시스템을 도입하기 위해 면제(面制)를 실시하게 되는데, 그 사전 작업으로 각 지방 제도의 구역과 인구의 편차를 평균화하기 위해 1914년 군 면 동 리 통폐합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로 인하여 경기도 양주군 해등촌면은 이웃한 노원면(蘆原面)과 통합하여 노해면(蘆海面)이 되었다.
당시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에는 도봉리(道峰里), 방학리(放鶴里), 쌍문리(雙門里), 창동리(倉洞里), 월계리(月溪里), 공덕리(孔德里), 상계리(上溪里), 중계리(中溪里), 하계리(下溪里)가 소속되었다. 이중 도봉리, 방학리, 쌍문리, 창동리가 현재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지역에 해당한다.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은 해방 이후에도 지속되다가 1963년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편입되면서 폐지되었다.
2. 노해면협의회의 설치
3·1 운동 이 발발하자 일제는 유화 정책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그 일환으로 지방 자치제의 실시를 표방하며 도(道)·부(府)·면(面)에 자문 기관을 설치하여 조선인들이 참정권을 획득한 것처럼 선전하였다. 이와 함께 면에는 면협의회를 설치했으며,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에도 노해면협의회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면협의회 의원들은 상위 기관장인 군수가 임명했으며, 자문 사항은 예산과 부과금, 사용료·수수료 또는 부역의 부과와 현품의 징수, 차입금에 관한 사항 등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게다가 개회도 면장의 권한이라서 면협의회가 유명무실한 경우가 많았다.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자치 운동과 함께 지방 자치제의 실시를 주장하는 여론이 높아지는 한편, 사회주의 운동, 신간회 운동 등의 각종 사회 운동과 소작 쟁의, 노동 쟁의 등이 활발해지면서 일제의 통치에 균열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일제는 기존 각 단위의 협의회를 자문 기관에서 의결 기관으로 개편하고 의원 선출도 추천제에서 선거제로 변경하였다. 1930년 면협의회 의원 선출도 선거제로 변경되었고,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에서도 1931년부터 면협의회 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면협의회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면협의회는 사실상 여전히 자문 기관이었다. 선거권 및 피선거권 자격 요건도 25세 이상의 가구주로서 읍·면세 연 5원 이상 납부한 자로 한정하여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면협의회 의원 선거는 1931년 5월 21일을 시작으로 4년마다 한 번씩 실시하여 1935년과 1939년에도 실시되었으나, 태평양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1943년에는 추천 선거제가 실시되어 선거제가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경제]
1. 경원선 부설
조선 시대 말에 이르기까지 도봉구 지역은 도봉산 아래의 한적한 시골이었으나, 경원선이 부설되고 창동역이 설치되면서 서울과의 교통교류가 활발해졌다. 경원선은 서울에서 원산까지 222.7㎞를 잇고, 서쪽으로는 경인선과 연결되고 동북쪽으로는 함경선과 연결되는 중요한 철도였다. 따라서 경원선의 부설권을 둘러싸고 열강들 간에 치열한 경쟁이 전개되었다.
이후 러일 전쟁이 발발하면서 일제가 무단으로 경원선을 부설하기 시작했으나 철로 부설 지역 토지 소유자들이 강력하게 저항하여 공사가 중단되었다. 한일 병합 이후 일제가 다시 본격적으로 경원선 부설에 착수하였다. 1910년 10월 용산~의정부 구간이 기공식과 함께 공사가 시작되어 1911년 11월에 준공된데 이어, 1914년 8월에는 전 노선 222.7㎞가 완성되었다. 경원선의 부설로 도봉구 지역은 서울 동북 지역 교통 및 물류의 중심지가 되었다.
2. 조선 대화 방적 주식회사의 설립
일제 강점기 일본인과 조선인에 의해 기업들이 도처에 설치되었다. 1942년에는 도봉구 창동리에도 조선 대화 방적 주식회사(朝鮮大和紡績株式會社)가 설립되었다. 직기 150기 정도의 크지 않은 규모의 회사였던 것으로 추정되나 해방 후에는 적산으로 분류·처분되었고, 당시 공장 인수자가 공장을 운영하지 않고 돈이 될 만한 물품이나 기계류를 처분해버려 제대로 조업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후 1949년 대아 방직 주식회사(大亞紡織株式會社)로 회사명을 변경하여 조업을 개시했으나 6·25 전쟁으로 전시설이 소실되어 1952년경에 폐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1943년에 도봉구 창동리에 공장을 세우면서 무연고 묘지를 정리할 때 거의 부패하지 않은 미라가 발견되어 세간에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민족 운동]
1. 3·1 운동
일제는 군사력으로 한국을 강점한 후 항일 지사들을 탄압하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박탈했으며, 헌병 경찰제를 통한 강권적인 무단 통치를 실시하여 조선인들에 대한 탄압과 수탈을 자행하였다.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파리 강화 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이 천명한 민족 자결 주의에 고양된 국내외 항일 지사들이 독립운동을 준비하여 고종 장례식 이틀 전인 3월 1일에 탑골 공원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만세 시위는 곧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경기도에서는 3월 3일 개성을 필두로 하여 인천, 양평, 안성, 양주 등으로 이어졌다.
경기도 양주군에서는 경기도 군들 중에서도 이른 시점인 1919년 3월 13일부터 미금면 평내리에서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하여 3월 31일까지 이어졌다. 그중 현 서울특별시 도봉구 지역에 해당하는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에서는 도봉리와 창동리에서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도봉리에서는 3월 26일 약 400명의 군중이 만세를 고창하며 시위운동을 전개했으나 일제 헌병이 출동하여 해산시켰고, 창동리에서는 3월 29일 약 500명의 주민들이 시위운동을 전개했으나 역시 일제 헌병이 출동하여 주동자 이하 92명을 검거하고 해산시켰다.
2. 일제 강점기 말기 애국지사의 은둔처
일제는 1931년 만주 사변,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키며 점차 전면전으로 나아갔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을 병참 기지로 설정하고 각종 물자와 인력을 동원하였다. 이와 함께 항일 세력은 철저히 탄압하고 조선의 민족성을 완전히 말살했으며, 사회의 유력자 및 지도층을 친일파로 만들어 내선일체를 외치며 조선인을 황국 신민화하고 전쟁에 동원하는 선전에 앞장서게 하였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일제에 협조를 거부하며 지조를 지키려 했던 애국지사들이 서울에서 멀지 않으면서도 한적한 농촌이었던 현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 지역을 은신처로 삼아 이주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대표적인 인사로는 ‘창동의 세 마리 사자’라고 불리던 가인(佳人) 김병로(金炳魯),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가 있었고, 『임꺽정』을 집필했던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 일가 등이 있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은거하며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고 독립을 염원하였다. 요시찰 인물이었던 이들이 이곳에 은거하면서 양주 경찰서에서는 고등계가 설치되었고 창동 주재소에서는 고등계 형사들이 상주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더욱 거세어지자 창동을 떠나 아예 시골로 낙향하는 인사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