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7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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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無影 |
이칭/별칭 | 용삼,무갑,용구 |
분야 | 역사/근현대,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진선 |
출생 시기/일시 | 1908년 1월 14일 - 이무영 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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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16년 - 이무영 사립 용명 학교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920년 - 이무영 서울 휘문 고등 보통학교 입학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 이무영 장편 『의지할 곳 없는 청춘』 간행 |
몰년 시기/일시 | 1960년 4월 21일 - 이무영 졸 |
추모 시기/일시 | 1985년 4월 20일 - 이무영 충청북도 음성읍에 ‘이무영 선생 문학비’ 건립 |
출생지 | 이무영 출생지 -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석인리 오리골 |
묘소 | 천주교 혜화동 교회 방학동 묘원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5-1 외 |
성격 | 소설가 |
성별 | 남 |
본관 | 경주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천주교 혜화동 교회 방학동 묘원에 안장된 소설가.
[개설]
이무영은 1908년에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석인리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갑룡(甲龍), 아명은 용삼(龍三), 무갑(戊甲), 용구(龍九) 등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한국 농민 소설의 선구자로 평가되며, 농촌 현실의 심각한 궁핍 현상과 구조적 모순을 작품 속에서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1960년 4월 21일에 52세의 나이로 뇌일혈로 사망하였다.
[활동 사항]
이무영은 1925년 휘문 고등 보통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조[成城] 중학교에서 수학하다가 『문학 시대』 편집자였던 작가 가토 다케오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4년간 작가 수업을 받았다. 18세 때인 1926년 6월에 『조선 문단』에 단편 소설 「달순의 출가」를 ‘이용구’라는 이름으로 투고하면서 작가로서 첫발을 내딛었다. 1927년에 첫 장편 소설 『의지할 곳 없는 청춘』, 1928년에 『폐허의 울음』을 간행하였지만 문단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귀국하여 방황하게 된다. 생계를 위해 출판사·잡지사 직원이나 학습소 교원 등으로 전전하던 중, 1932년 1월에 『동아 일보』에 공모한 희곡 「한낮에 꿈꾸는 사람들」이 당선되어 그 인연으로 1934년에 학예부 기자로 입사하게 되었다.
1932년에 극예술 연구회 동인으로 가입하였고, 1933년에 이효석·정지용 등과 구인회 동인으로 활동하기도 하였으며, 이흡과 함께 『조선 문학』을 한동안 발간하여 문단에 활력을 주기도 하였다. 1933년 『동아 일보』에 『지축을 돌리는 사람들』이라는 중편을 연재하면서 작가로서의 위치를 다지게 된다. 그 후 단편 「B녀의 소묘」·「취향」, 장편 『먼동이 틀 때』·『명일의 포도』, 희곡 『톨스토이』 등을 발표하였다. 1939년에 ‘생활’과 ‘문학’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동아 일보』 기자직을 사직하고, 경기도 군포의 궁말[宮村] 옆 샛말이란 동네로 이주하여, 창작 활동에 전념하였다.
이무영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제1과 제1장」이 군포로 내려 온 해에 쓴 것이고, 후에 「흙의 노예」, 「농민」 등 중요한 소설도 썼다. 자신이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작가의 눈으로 농민을 체험해 보고 관찰함으로써 삶과 문학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을 통하여 이무영은 여기서 문학의 일대 전환을 꾀하게 된다. 1943년 일본어로 나오는 『부산 일보』에 연재하였던[1942~1943] 장편 『청기와 집』이 ‘조선 예술상’을 수상하였으며, 6·25 전쟁 중에는 염상섭·윤백남과 함께 해군에 입대하여, 해군 정훈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농촌보다 도시를 제재로 한 시정(市井) 소설을 썼다. 서울 대학교, 연희 대학교[현 연세 대학교] 등의 강사를 거쳐 단국 대학교 교수를 지냈고, ‘전국 문화 단체 총연합회[문총]’ 최고 위원와 ‘자유 문학자 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저술 및 작품]
이무영은 일제 강점기인 1926년부터 해방기, 한국 전쟁기를 거쳐 자유당 집권 말기인 1950년대 말까지 180여 편의 장·단편 소설을 비롯하여 다수의 평론 및 15편 정도의 희곡 작품을 남겼다. 도쿄[東京]에서 작가 수업을 할 당시에 발표한 『폐허의 울음』[1928] 등의 초반 작품은 어느 곳에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폐허 의식 속에서 방황하고 좌절하는 젊은이들을 그리고 있다. 1930년대 전기 대표작은 『반역자』[1931], 『지축을 돌리는 사람들』[1932], 『루바슈카』[1933], 『농부』[1934] 등으로 지식인의 현실 대응 문제를 소설의 중심 제재로 삼았다.
1930년대 후기 소설의 중심 제재는 크게 보아 현실 문제와 통속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자로는 구체성 있는 농촌 문제 인식과 저항 의식을 표출한 『산가』[1935], 『만보 노인』[1935] 등의 작품이 있고, 후자로는 현실 문제보다는 통속적 오락물을 추구한 『먼동이 틀 때』[1935], 『명일의 포도』[1937] 등의 작품이 있다. 1939년 귀농을 하면서부터 해방까지의 소설은 귀농 문제를 중심 제재로 다루면서, 반근대적, 반진보적 농촌·농민관을 드러내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제1과 제1장』[1939], 『흙의 노예』[1940], 『향가』[1943] 등이 있다.
일제 강점기 말에는 일본어 소설 『청기와 집』[1943] 등 친일적인 색체의 작품들을 쓰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에 이무영 소설은 우익 이데올로기와 이승만 정권에 대한 적극적 지지를 바탕에 두고 있는데, 『삼년』[1947], 『젊은 사람들』[1952], 『O형의 인간』[1953] 등이 대표 작품이다. 단행본으로 『취향』[1937], 『무영단편집』[1938], 『B녀의 소묘』[1951], 『농민』[1954], 『벽화』[1958] 등이 있으며, 기행 수필집 『고도승지대관』[1948], 대학 출강 당시 간행한 이론서 『소설작법』[1949] 등이 있다. 1975년에 신구 문화사에서 『이무영 대표작 선집』[전 5권]을 간행하였고, 2000년에 국학 자료원에서 『이무영 문학 전집』[전 6권]을 간행하였다.
[묘소]
이무영의 장례식은 1960년 4월 25일 오전 11시에 명동 성당 문화관에서 ‘한국 예술 문화 단체 총연합회장’으로 거행되었다. 묘소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천주교 혜화동 교회 방학동 묘원에 있으며, 1960년 6월 26일에 도봉구 방학동의 이무영 묘소에서 묘비가 제막되었다. 조각가 차근호의 작품으로, 구상이 ‘농민 문학의 선구자 소설가 이무영 선생 묘비’라는 묘비명을 썼다.
[상훈과 추모]
1943년에 일본어 장편 『청기와집』으로 ‘조선 예술상’을 수상하였으며, 1956년에 『농부전초(農夫傳抄)』로 제4회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1985년 4월 20일에 이무영의 고향인 충청북도 음성읍에 ‘이무영 선생 문학비’가 세워졌으며, 2000년 4월 21에는 ‘무영 문학상’이 제정되어 매년 4월 음성군에서 열리는 ‘무영제’[1994년 이무영을 추모하기 위해 제정됨]에서 시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