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08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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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龜尾斥和碑 |
영어의미역 | Gumi Antiforeign Steles |
이칭/별칭 | 대원군척화비(大院君斥和碑)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구포동 산 52-1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박재관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5년 8월 5일 - 구미 척화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2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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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구미 척화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재지정 |
성격 | 금석각류|척화비 |
건립시기/일시 | 1871년 |
관련인물 | 흥선대원군 |
재질 | 화강암 |
높이 | 175㎝ |
너비 | 186㎝ |
소재지 주소 | 경상북도 구미시 구포동 산 52-1 |
소유자 | 국유 |
문화재 지정 번호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
[정의]
경상북도 구미시 구포동에 있는 조선 말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
[건립경위]
조선 말 흥선대원군이 1866년(고종 3)의 병인양요와 1871년(고종 8)의 신미양요를 겪은 이후 내부적으로 쇄국의 의지를 다지고 외세의 침입을 경계하면서 온 나라에 경고하기 위하여 서울 종로와 전국의 주요 도로변에 건립하였다. 구미 척화비의 경우 칠곡 사람들이 서울로 드나드는 길목인 지금의 위치에 건립하였다.
[위치]
구미시 구포동의 구미3공단에서 구미2공단으로 넘어가는 솔뫼고개의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형태]
남아 있는 전국의 척화비 가운데 유일하게 자연석의 암석을 쪼아 새긴 형태이다. 암석은 높이 175㎝, 너비 186㎝이고, 비석은 높이 115㎝, 너비 50㎝이며, 재질은 화강암이다. 암석을 다듬어 새긴 것이 아니라 큰 암석을 비석의 형태로 깎아내고 여기에 비문을 새겼다.
[금석문]
비문은 앞면에 모두 12자의 본문을 새기고, 아래에 작은 글자로 ‘병인작신미립(丙寅作辛未立)’이라 하여 구미 척화비의 건립 연대(1871년)를 기록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전국에 세운 다른 척화비의 비문과 같이 “서양 오랑캐가 침략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밖에 없으나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니 자손만대에 경고하노라”라고 되어 있다.
[현황]
구미 척화비는 임오군란 이후에 다른 곳에 세워진 척화비가 거의 다 부서지거나 땅에 묻힌 반면 자연석을 활용하였기 때문에 그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한 석공이 이 비석 바위를 다듬어 상석을 만들려고 했는데 주민들의 만류로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최근에 주변을 새로 단장하여 정비하였는데, 도로에 면한 아래쪽에 문화재 안내판을 세우고 그 왼쪽으로 계단을 설치하여 올라가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2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척화비는 서양에 저항하는 마음을 키우기 위해서 세운 비석이다. 또한 척화비에는 서양의 여러 문물로부터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보호하고 지켜나가려는 의지가 담겨져 있기도 하다. 하지만 척화비는 외세의 침략을 우리의 힘으로 막고자 하였다는 긍정적인 평가에 반하여 서양과의 통상 등을 늦추게 함으로써 근대화가 지연되는 데 일조하였다는 부정적인 면도 내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