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13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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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東望 |
영어음역 | Jeong Dongmang |
이칭/별칭 | 위로(渭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용만 |
성격 | 무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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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
성별 | 남 |
생년 | 1592년 |
몰년 | 1640년경 |
본관 | 해주 |
대표관직 | 충청병사 |
[정의]
조선 후기 구미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해주. 자는 위로(渭老). 정붕(鄭鵬)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병사(兵使) 정루(鄭縷)이다.
[활동사항]
1592년(선조 25)에 출생하였다. 당시 임진왜란 영향으로 나라가 편안치 못한지라 스스로 무(武)를 택하여 1618년(광해 10) 무과에 등제하였다. 많은 도적패가 조령에 웅거하여 백성을 괴롭히자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서 평정에 나섰고, 공주에 토포사(討捕使)로 가 도적들을 효유하여 그들의 생업을 도와주었다. 숙천부사로 흉년에 백성을 구휼하였고 이어 전라수사에 제수되었다. 옥천군수 재임시에 선정을 베푸니 백성들이 돌아오는 길에 말고삐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한다.
속리산에 입산하여 학문에 전념하려고 했으나 다시 해미현감(海美縣監)에 제수되었다. 마침 흉년으로 백성이 곤란함에 관용(官用)을 아껴서 기아를 구제하였다. 1640년(인조 18) 충청병사에 제수되었으나 그 해 병이 났다. 임종에 이르러 “보검에 녹이 슬고 준마가 헛되이 늙는다”고 한탄했다. 왕은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고 공주의 옛 토적들이 3년 동안 여막을 지켰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