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3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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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國債報償運動 |
영어공식명칭 | The National Debt Compensation Effor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1907년 4월 경상북도 경산 지역에서 전개된 국권 회복 운동.
[개설]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은 일제가 차관 1,300만원을 빌미로 대한제국을 경제적으로 예속시키려 하자, 모금을 통해 이를 저지하려는 운동이다. 경산 지역에서는 1907년 4월부터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국채보상운동은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국권 회복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범국민적 운동이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광무 11) 1월 부산상무소(釜山商務所)에서 처음 논의되었으며, 1907년 1월 29일에는 「국채 일천삼백만원 보상 취지서(國債一千三百萬圓報償趣旨書)」라는 격문을 대구광문사(大邱廣文社) 사장 김광제(金光濟), 부사장 서상돈(徐相敦), 대동광문회 회장 박해령(朴海齡) 등 16명의 이름으로 발송하면서 전국 각처에서 본격적인 모금 운동이 전개되었다. 경산 지역에서는 1907년 4월 경산군국채보상단연동맹회(慶山郡國債報償斷煙同盟會)가 조직되고, 「경산군국채보상단연동맹회취지서(慶山郡國債報償斷煙同盟會趣旨書)」가 반포되었다.
[관련 기록]
1907년 4월 28일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잡보(雜報)에 게재된 「경산군국채보상단연동맹회취지서(慶山郡國債補償斷煙同盟會趣旨書)」를 통해 경산 지역 국채보상운동의 목적과 취지를 살펴 볼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산군국채보상단연동맹회취지서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우리의 습속은 순박하였는데, 세상이 경박하여 나라는 여위고 백성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루 또 하루가 지나서 국가의 외채가 1,300만 원에 이르러 이 빛을 갚을 기약이 없어서 찬장만 바라보며 탄식하고 눈물만 흘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요즈음 의연금을 모집하자는 주장이 서상돈씨의 단연동맹(斷煙同盟)에서 나왔습니다. 한 사람이 먼저 주장하니 만 사람이 그림자 따르듯이 응답하고 있습니다. “근본이 단단하면 나라가 평안하다.”라고 하였으니, 이 때가 바로 그 떼입니다. 오직 이 경산은 비록 외지고 작은 지방이지만, 끓어오르는 충성심과 뜨거운 애국심은 어찌 감히 다른 지방에 뒤처지겠습니까? 지금 한두 동지와 함께 감히 이것을 널리 알립니다. 오직 동포는 각자 의연금을 내어서 국채를 청산하여 우리 성상(聖上)이 사랑하고 길러주신 은혜를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하기를 바랍니다.
발기인
최백희(崔伯熙), 김우숙(金宇淑), 김창신(金昌信) 등”
[내용]
경산 지역의 국채보상운동은 최백희(崔伯熙), 김우숙(金宇淑), 김창신(金昌信) 등의 선각적 인사들의 발기로 시작되었다. 그 결과 1908년 4월 경산군국채보상단연동맹회가 조직되었으며, 발기인회를 개최하여 「경산군국채보상단연동맹회취지서」를 반포하였다.
[변천]
경산 지역의 국채보상운동은 주위 지역에도 영향을 미쳐 하양군(河陽郡)에서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다. 1908년(융희 1) 국채보상운동은 와해되는데, 경산 지역의 운동도 이 무렵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경산 지역의 국채보상운동은 경산 지역의 선각적인 인사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국권 회복 운동을 대중 운동으로 확산시키는 데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