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4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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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社會運動 |
영어공식명칭 | social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경산 지역에서 사회 변화나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 전개된 사회 개혁 운동.
[개설]
일제 강점기 사회 운동은 사회문제를 해결하거나, 사회 체제를 변혁하기 위한 대중들의 자발적이고 조직적인 활동을 뜻한다. 대표적으로는 청년운동·형평운동·신간회운동 등이 있다. 일제 강점기 경산 지역의 사회 운동은 1920년대부터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청년운동]
일제 강점기 사회운동은 청년운동에서 시작되었다. 1920년대 전반 청년운동은 강습소와 야학 운영, 학교에 준하는 청년학원 운영 등 교육 사업으로 전개되었다. 청년운동 단체는 정기적으로 토론회나 강연회를 열어 회원의 지식을 개발하는데 치중하였다. 강연회와 토론회는 회원들의 수양과 훈련, 그리고 대중의 계몽수단으로 인식되었다.
경산 지역의 청년운동은 1920년 11월 16일 창립된 경산기독청년회(慶山基督靑年會)를 시작으로 1921년 창립된 자인청년구락부, 1921년 10월 창립된 경산청년회, 1922년 창립된 자인청년회, 1926년 창립된 안심청년회, 1927년 창립된 하양청년회, 1927년 5월 창립된 하양여자친목회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 중 경산기독청년회는 기독교적 성격의 청년단체로 결성되어 1921년 경산청년회로 발전하였으며, 자인청년구락부는 1922년 자인청년회로 발전하였다. 1920년대 전반기 경산 지역 청년운동의 중심은 경산청년회였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무렵 경산청년회 활동은 점차 침체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부르주아 민족주의 사상과 사회주의 사상의 분리·대립이 노정되고, 사회주의 청년운동이 민족주의 청년운동을 압도해 나가는 상황 속에서, 조선청년회연합회의 전국대회가 무산된 이후 나타난 현상이었다. 그런 가운데 1924년 4월 조선청년총동맹이 결성되면서 민족주의 진영의 청년운동은 와해되었고, 사회혁명주의를 지도이념으로 삼고 계급투쟁을 행동 강령으로 하는 청년운동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그 결과 경산청년회도 종래의 계몽적이고 문화운동적인 청년운동을 탈피하고, 대중본위의 사회운동을 지향하여 활로를 모색하였다. 이에 1927년 경우단(慶友團)이 등장하여 사회주의 청년운동을 이끌었고, 같은 해 10월에는 단일 노선을 지향하는 경산청년동맹(慶山靑年同盟)이 결성되어 다른 청년 단체를 통합해 나갔다.
[형평운동]
형평운동은 근대 이후에도 신분적 차별을 받던 백정(白丁)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인권운동이다. 경산 지역에서는 1924년 5월 형평동진청년회가 창립되었고, 1925년 전후로 경산형평청년회·자인형평청년회·하양형평청년회가 조직되었다. 이 가운데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인 단체는 하양형평청년회였다. 하양형평청년회는 1928년 1월 개최된 임시총회에서 ‘1. 우리 운동선상의 방해자에게 적극적으로 대항할 것, 1. 경산형평동진청년회를 지지할 것, 1. 형평사원으로서 사의 체면을 오염한 자에 대하여 처벌할 것’ 등을 결의하기도 했다.
[신간회 운동]
1927년 2월 ‘민족 유일당 민족협동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제휴하여 신간회(新幹會)를 창립하였다. 이후 1931년까지 신간회는 전국에 140여 개의 지회를 운영하였다. 경산 지역의 신간회 운동은 1927년 11월 19일 영천의 은해사(銀海寺) 포교소(布敎所)에서 개최된 간담회에서 처음 논의되었다. 이 모임에는 하양청년회(河陽靑年會) 및 하양노동공제회(河陽勞動共濟會)의 간부들이 모였으며, 신간회 창립 이외에도 노동야학(勞動夜學) 설립, 소작문제(小作問題)에 관한 결의가 있었다. 그 결과 1928년 2월과 3월에 신간회 하양지회와 경산지회가 설립되었다. 특히 하양지회는 미신 타파, 검은 옷 착용, 조혼 금지 등 사회문제 개선을 위해 노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