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441
한자 强制徵用
영어공식명칭 Forced Labor
이칭/별칭 강제동원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정의]

일제 강점기 전시 체제하 경상북도 경산 지역에서 일어난 인력 수탈.

[개설]

1944~1945년 일제 강점기 말기 전치체제 하에서 일제는 인적·물적 수탈을 강화해 나갔다. 그런 가운데 국가총동원법(國家總動員法)과 국민징용령(國民徵用令)을 통해 전장과 공장 등지로 우리 민족을 강제적으로 동원하였다. 그런 가운데 경산 지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강제징용 되었으며, 대왕산 죽창의거와 같은 저항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배경]

1931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는 소위 ‘15년 전쟁’을 수행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식민지 조선에 대한 정책도 1931년 만주사변 이후의 준전시체제(準戰時體制), 1937년 중일전쟁 이후의 전시체제(戰時體制), 그리고 1941년 태평양전쟁 이후의 비상전시체제(非常戰時體制)로 이행되었다. 이 기간 중 식민지 조선은 일본 군국주의의 폭압통치와 대륙침략전쟁의 병참기지화(兵站基地化)로 인적·물적 수탈을 감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산 지역 강제징용의 저항과 참상]

1944년부터 일제는 본격적으로 경산 지역의 청년들을 전쟁터로 끌고 갔다. 이를 위해 각 면에서 징병검사를 실시하였으며, 청소년 대상의 청년훈련소(靑年訓鍊所), 무학적령자를 대상으로 한 특별청년연성소(特別靑年鍊成所), 무학 미혼여성을 대상으로 한 여자특별청년연성소(女子特別靑年鍊成所)를 설치하는 등 인력 수탈을 체계적으로 준비하였다.

1944년 6월 17일에는 경상북도 도청 소회의실에서 22개 군 군수가 모인 가운데, 강제징용에 관한 극비지시가 내려졌다. 그 결과 경산 지역에서는 350명[경산면 29, 안심면 32, 용성면 26, 자인면 18, 남산면 18, 압량면 31, 남천면 12, 진량면 34, 하양면 21, 고산면 5, 와촌면 24, 그 외 주소 불명자 등]이 강제로 징발되었다. 1944년 6월 24일 징용된 350명은 경산군청 앞 광장에서 간단한 의식을 마친 뒤, 다음날 대구 앞산 밑 연병장에 집결하여 형식적인 신체검사를 마쳤다. 경상북도 내에서 징발된 약 3,000여 명은 각각 소대와 분대로 편제되었다. 경산군에서 징발된 인원들은 8886부대 3중대 2소대와 3소대에 배속되었다. 이때 징발된 경산 지역 청년 29명은 징용반대투쟁을 결의하고 대왕산으로 들어가 일경과 대치하며 투쟁하였으니, 이것이 일명 대왕산 죽창의거이다.

1944년 7월 13일 경산 출신 350명은 대구역을 출발해 부산 초량역을 거쳐 15일 부관연락선에 탑승하였다. 이 배를 타고 시모노세키와 모지[門司], 그리고 다시 가고시마[鹿兒島]를 거쳐, 8월 15일 오키나와현 나하시에 도착하였다. 경산 사람들이 포함된 8886부대는 32군 오키나와 근거지대(根拠地隊)에 배속되어, 일명 ‘8886 수근부대(水勤部隊)’로 불렸다. 이들은 주로 나하항 부두 하역작업을 전담하였다.

1946년 고향으로 돌아온 경산의 징용자들은 350명 중 275명에 불과하였고, 나머지 75명은 사망하였다. 1987년 생존하고 있는 귀향자 251명은 태평양동지회(太平洋同志會)를 결성하였으며, 동료 40여 명을 추모하는 태평양동지위령탑을 경산시 남천면 백합공원에 건립하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