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005T030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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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龍藏마을-特性-高麗의 對蒙抗爭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 용장마을 |
집필자 | 변동명 |
[고려의 대몽 항쟁]
북아시아의 초원지대에서 성장한 몽고(蒙古)와 같은 유목민족의 가장 중요한 정복대상은 남쪽의 농경민족이었다. 농경민족들이 지니는 풍부한 생산품이 그 구미를 돋우어 준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금(金)·송(宋)과 함께 고려도 몽고의 침략 대상 가운데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금을 치고 남송(南宋)과 일본(日本)을 정복하기 위한 기지를 구하려는 목적도 몽고가 고려에 침략의 손길을 뻗친 하나의 이유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가 몽고와 최초의 접촉을 가지게 된 것은 몽고에게 쫓겨 오는 거란인(契丹人)을 협공하던 때부터였다. 거란인은 금이 망할 무렵 독립하였다가 다시 몽고에게 쫓기어 고려의 국경 안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이들은 강동성(江東城)에 모여들어 버티고자 하였으나, 1219년(고종 6) 고려는 몽고와 함께 이를 함락해 버렸다.
이러한 일이 있은 이후 몽고는 고려에 대한 은인으로 자처하고 매년 고려로부터 공물(貢物)을 취하여 갔다. 그 요구가 지나치게 무거운 것이었기 때문에 고려에서는 때로 그에 불응하는 일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계기로 고려와 몽고와의 사이는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몽고의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고려로부터 귀국하던 도중에 살해된 일을 구실로, 몽고는 드디어 1231년(고종 18)에 제1차 침입을 하게 되었다.
살례탑(撒禮塔)이 거느린 몽고군은 구주(龜州)에서 수비하던 장수 박서(朴犀)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으나, 이를 버려둔 채 곧바로 수도 개경을 압박해 들어왔다. 이에 고려가 강화를 청하였고, 몽고는 군사를 철수시키면서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서북면(西北面)에 남겨두었다.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려는 속셈에서였다.
그러자 무인집권자 최이(崔怡, 崔瑀])는 몽고에 맞서 항쟁할 것을 결의하고 수도를 강화(江華)로 옮기었다(1232). 이것은 바다를 두려워하는 몽고의 약점을 찌른 것이었다. 귀족들이 강화로 들어감과 동시에 일반 백성들에게도 산성(山城)이나 섬으로 피난케 하였다.
이러한 고려의 항몽정책은 몽고를 자극하여 재차의 침입을 보게 되었다. 비록 몽고의 장군 살례탑(撒禮塔)이 처인성(處仁城)[龍仁]에서 김윤후(金允侯)가 거느린 처인부곡민(處仁部曲民)에게 사살된 후 곧 물러갔으나, 뒤에도 몽고의 침략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이리하여 몽고는 전후 30년에 걸쳐 6차례의 침입을 해오기에 이르렀다.
이쪽 언덕에 서면 그 건너편이 바로 눈앞에 바라다 보이는 곳이 강화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좁은 강수(江水) 하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몽고는 고려의 군신(君臣)을 향하여 육지로 나오라고 외쳐대는 게 고작이었다. 몽고는 고려정부가 육지로 나오면 군대를 철수시키겠노라고 하였다. 공연히 입씨름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문제는 집권자 최씨의 항전의욕이 얼마나 강한가의 여부에 있었다. 이 항전의욕이 굽힐 수 없는 것인 이상 몽고의 강화도 점령이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 동안 강화도로 들어간 최씨를 비롯한 고려의 귀족들은 안전한 환경 속에서 개경에서와 다름없는 호사스런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궁성·저택·사원·격구장(擊毬場) 등 모든 시설은 개경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였다. 연등(燃燈)·팔관(八關) 등의 명절마다 환락이 넘쳤다. 물건을 배에 실어 나르는 조운(漕運)에 의하여 안전한 해상 통로를 거쳐 수송되어 오는 조세(租稅)의 수입이 여전하였기 때문이다.
무인정권의 대몽항쟁은 처음 농민이나 천민들의 뒷받침을 받아 수행되었다. 그러나 강도(江都)[江華]의 정부는 전쟁이 지속됨에 따라 황폐화된 농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대책을 서두르기보다는, 오히려 가혹한 수취로 그 생활을 더욱 곤란케 할 뿐이었다. 농민들의 정부에 대한 반항심을 조장시키며, 또한 몽고에 대한 항쟁의욕을 꺾어버리는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민심의 이반 속에서 국왕과 문신을 중심으로 몽고에 대한 강화(講和)의 여론이 일어나는 것은 필연이었다. 그리하여 몇 차례의 정변(政變)을 겪으면서 무인정권이 타도되었고, 고려는 개경으로 환도(還都)하여 이후 몽고에 대한 항쟁을 완전히 포기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