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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마을-특성-삼별초와 대몽항쟁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005T03044
한자 龍藏마을-特性-三別抄와 對蒙抗爭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 용장마을
집필자 변동명

[삼별초와 대몽항쟁]

삼별초(三別抄)는 최씨 무인정권에 의해서 창설된 군사조직이었다. 야간순찰과 같은 공적(公的)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함이라는 게 그 명분이었다. 그 시초는 최씨정권의 제2대 집권자인 최이가 수도의 치안을 빙자해서 창설한 야별초(夜別抄)라는 특수부대였다. 무인의 일당인 악소(惡少)의 무리들이 날뛰지 못하도록 막아 그 정권을 공고히 할 목적에서였다.

이 야별초가 후에 소속 군인 숫자의 증가에 따라 좌별초(左別抄)와 우별초(右別抄)로 나뉘었고, 여기에 몽고와의 전란 중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도망쳐 돌아온 자들로 신의군(神義軍)이 구성되면서, 이들을 합하여 삼별초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다음의 기록에 그것이 잘 나타나 있다.

“처음에 최우(崔瑀, 崔怡)가 나라 안에 도적이 많음을 근심하여 용맹한 자들을 모아 밤마다 순찰토록 하여 폭력을 금하였는데, 이로 인해 야별초라 이름이 붙었다. 지방의 여러 도(道)에서 도적이 일어남에 따라 야별초군을 나누어 파견하여 그들을 잡아 오게 하였으며, 그리하여 소속된 군인의 숫자가 더욱 늘어나자 드디어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었다. 또한 나라 사람으로서 몽고로부터 도망쳐 돌아온 자들로 하나의 부대를 조직하여 신의군이라 불렀는데, 이 셋이 삼별초이다.

권신(權臣 : 무인집권자)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이들을 군사적 기반으로 삼아 그 녹봉(祿俸)을 두터이 하며 혹은 사사로이 은혜를 베풀고 또한 죄지은 자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권신이 손가락질 하나로 마음껏 부려먹었고, 이들은 앞을 다투어 있는 힘을 다하였다.”(『고려사』 81병 1병제, 원종 11년 5월)

삼별초는 집권자인 최씨 가문을 위해서 복무하는 사병적(私兵的)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국가의 녹(祿)을 먹는 관군이었다. 그리하여 뒤에는, 위 기록에도 나오듯이 수도의 야간순찰에 더해 지방에서 봉기한 농민들과 같은 체제이탈세력을 진압하는 데 동원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무엇보다도 무인정권의 보위를 제일의 존립 목표로 삼던 군사조직이었다. 단순한 군사력이라기보다는, 그 정치적 역할을 기대하며 집권무인이 남다른 배려 속에서 창설한 특수부대가 곧 삼별초였던 셈이다.

한편 삼별초는 그처럼 무인정권의 전위부대이자, 약 30년 가까운 기간 동안 몽고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선봉이기도 하였다. 우리 민족의 대외항쟁사를 구성하는 주요한 부분 가운데 하나가 곧 이들을 포함한 고려인들의 대몽항전(對蒙抗戰)이었다. 따라서 삼별초의 몽고에 대한 항전이 무인정권을 보위하기 위한 차원에서의 행위였다 할지라도, 그 의미를 간과할 수만은 없다. 이들이 후일 몽고에 항복한 개경의 정부와 대립하는 가운데 진도(珍島)와 제주도(濟州島)로 옮겨가며 항몽전쟁에 나서게 된 뿌리가 거기에 있음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삼별초는 그렇듯 몽고와의 항쟁에서 자못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들의 몽고에 대한 적개심도 또한 대단히 깊었다. 따라서 그들은 몽고에 대한 항쟁을 포기하고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하는 데 반대하였다. 그것이 결국 몽고에 대한 항복이자 예속을 뜻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어느 면에서는 삼별초의 존재의의를 부정하는 조치이기도 하였다. 항몽전쟁의 종결로 삼별초의 주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가 사라지게 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려의 몽고에 대한 예속은, 항몽전쟁에 앞장선 그들의 기득권은 물론 생명까지도 위협하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실제로 몽고에서는 삼별초에 보복을 가하려는 속셈을 지녔던 듯싶기도 한데, 왕(元宗)이 장군 김지저(金之氐)를 보내 강화(江華)에 들어가 삼별초를 혁파하고 그 명적(名籍)을 취하여 돌아오게 하였다. 삼별초는 그 명적이 몽고에 알려질까 두려워하여 더욱 반심(反心)을 품었는데, “배중손(裵仲孫)이 야별초 지유(指諭) 노영희(盧永禧) 등과 더불어 난을 일으켜….”(『고려사』130반역 4 배중손전)와 같은 기록에서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몽고와 강화한 뒤 개경정부에서 삼별초를 해산하는 것과 함께 그들의 신상이 기록된 문서(名籍)를 압수해 가자, 그것이 몽고에 알려질 것을 걱정한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몽고의 보복을 예상하고서 삼별초가 선수를 쳐 일어섰다는 게 『고려사』 찬자들의 인식인 셈이거니와, 앞날을 기약하기 어려운 속에서 생명마저 위협받게 되자 삼별초가 봉기하기에 이르렀음을 능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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