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11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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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搢神道碑 |
영어의미역 | Spirit Path Monument of Yun Ji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조성진 |
성격 | 신도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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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일시 | 조선 후기 |
높이 | 210㎝ |
너비 | 98㎝ |
소재지 주소 |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 |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에 있는 조선 후기 윤진의 신도비.
[개설]
윤진은 1631년(인조 9)에 태어나 1698년(숙종 24)에 사망하였다. 윤진의 자는 자경이고 호는 덕포이며 본관은 파평이다. 윤순거의 아들로 1652년 생원시에 급제하고 빙고별검으로 있다가 1666년(현종 7)에 별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지평, 이조좌랑, 수찬, 병조정랑 등을 거쳐 부교리가 되었다.
왕에게 붕당을 없앨 것과 지방 관원을 중히 하고 도적을 그치게 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려 이조정랑으로 옮겨졌다. 1681년(숙종 7) 봄에 사간으로 나갔다가 여름에 벼슬을 버리고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사후에 이조판서를 증직받았고 뒤에 좌찬성을 증직받았다.
[건립경위]
윤진은 부제학을 지내고 사후에 이조판서를 증직받아 신도비를 세울 수 있었다. 1776년(영조 52)에 영의정 최규서가 비문을 짓고 손자 윤동도가 비문을 서사하고 외손 심성진이 전액을 썼다.
[위치]
노성면소재지에서 노성초등학교 가는 길로 2㎞ 정도 가면 병사리저수지가 나오고, 저수지를 끼고 들어가면 파평윤씨 세장지가 나오는데, 윤진 신도비는 파평윤씨 선영 하단에 윤순거 신도비, 윤전 신도비와 함께 서향으로 세워져 있다.
[형태]
조선 후기 비의 양식으로 낮은 농대석 위에 오석의 비신이 세워져 있고 큰 지붕돌[가첨석]을 얹어놓았다. 비신의 크기는 높이 210㎝, 폭 98㎝, 두께 42㎝이다. 비문은 해서로 자경이 3㎝ 정도이고 전액의 자경은 7.5㎝ 크기이다.
[금석문]
전액은 ‘행부제학증좌찬성덕포윤공신도비명(行副提學贈左贊成德浦尹公神道碑銘)’이라 새겨져 있고, 비제는 ‘유명조선국가선대부행홍문관부제학지제교겸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관증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겸판의금부사세자이사지경연사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춘추관성균관사오위도총부도총관덕포윤공신도비명병서(有明朝鮮國嘉善大夫行弘文館副提學知製敎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世子貳師知經筵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德浦尹公神道碑銘幷書)’이라 새겨져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현재의 임금 6년 경신년에 여러 선비들이 무리를 지어 나가서 착한 정치로 백성을 크게 교화시켰다. 이듬해 여름 경연신하 박태손이 왕께 말하기를 ‘나라에서 한 세상을 격려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조용히 물러나는 이를 높여야 할 것이니 지금 세상에서 윤진과 같은 이가 그 사람입니다.’ 하였다.
경연 김수항 경연 이민서가 계속 이 문제를 진언하니 순창군수에서 예조참의로 특진하되 공은 모두 사양하고 곧 돌아왔다. 계해년에 유신 박세채가 희정당에 나가 왕께 말하기를 ‘조용히 물러나는 사람은 어려운 일을 당하면 반드시 힘써 직분을 다하니 대각에 있게 한다면 반드시 바른 말을 할 것입니다. 만약 윤진을 불러들인다면 반드시 관망할 만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 하여 예조참의로 부르나 사직하고 물러났다.
갑술년에 공을 공조참의로 부르니 조금 있다가 대사헌으로 옮겼다. 영의정 남구만이 또 말하기를 ‘윤진의 문학과 아름다운 꿈을 버려둘 수 없으니 마땅히 정성스런 예로 힘써 이르게 하소서’ 하니 왕이 말하기를 ‘내 뜻도 그러하다.’ 하고 달래는 말로 ‘나의 그러한 뜻을 외면하지 말고 속히 올라오라’ 하였다.
임술년부터 경축년에 이르기까지 예조참의와 대사간을 배수한 것이 네 번이요 부제학은 두 번, 참판 한 번, 대사헌이 세 번, 밖으로는 충원현감과 춘천, 강릉부사와 경기도 관찰사를 명하니 조야에서 모두 한 번 일어나 관직에 나갈 것을 기대하였다.
공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작은 것을 사양하고 큰 것을 받으며 젊어서는 물러나고 늙어서는 나아가는 것을 내가 어찌 하리오’ 하고 마침내 부임하지 않았다. 무인년 3월 10일에 부제학으로 있을 때 집에서 돌아갔다. 온 세상에 이 소식이 전해지니 모두가 애통하고 안타까워하였다.”
[현황]
병사리에 있는 파평윤씨 묘역은 문중에서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어 전반적으로 잘 보존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물러나 조용히 은거하여 유유자적하면서 삶을 마친 모범적인 모습을 윤진을 통하여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