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08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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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茂峯里胎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무봉2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덕원 |
[정의]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무봉 2리에 있는 조선 후기 옹주의 태실.
[개설]
무봉리 태봉(茂峯里胎封)은 1735년(영조 11)에 태어난 영조의 후궁 소생의 옹주 아기씨(翁主阿只氏)의 태실(胎室)이다. 금표(禁標)에 의하여 엄격하게 보호를 받고 있던 이 태실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서 문화재 조사라는 명목 아래 옹주의 태를 담았던 태 항아리가 도굴되었다.
[건립 경위]
서울 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는 『태봉 등록(胎峰謄錄)』[규(奎) 12893]에 의하면 무봉리 태봉의 주인공은 1735년 9월 19일에 태어난 영조의 후궁 소생의 옹주 아기씨이다. 길지인 당시 포천현 서소흘산면 약사동 소재의 봉우리가 낙점된 후에 같은 해 10월 25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장태 길일(藏胎吉日)인 그해 11월 26일에 안태사(安胎使)로 임명된 도승지 김시형(金始炯)의 책임 아래 공사를 마친 내용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위치]
포천시 소흘읍 무봉리 마을에서 절골로 올라가는 도로 오른쪽의 태봉골에서 포천시 소흘읍 이곡리의 이곡 초등학교로 넘어가는 지름길인 고갯마루 남쪽 능선에 뾰족한 모양으로 특이하게 솟은 약 230m 높이의 태봉산(胎峰山) 정상에 위치하고 있었다. 도굴된 이후 계속 방치되어 오다가, 최근에 포천시 소흘읍 무봉리 주민들이 마을 느티나무 보호수 앞에 표석과 옹석(甕石)을 옮겨 놓았다.
[형태]
무봉리 태봉의 석재는 모두 화강암인데, 현재는 옹석과 표석만이 남아 있다. 옹석의 규모는 둘레 3m, 지름 1m, 높이 50㎝인데, 그 위에 높이 23㎝, 지름 1m의 개석이 원래 모습으로 올려 있다. 그 옆에는 대좌(臺座)와 비신(碑身), 그리고 이수(螭首)를 갖추고 있는 표석이 있다. 표석의 대좌 높이는 50㎝, 비신은 89×45×20㎝이다. 비신은 2면 비로 앞면에 ‘옹정십삼년구월십구일축시생옹주아지씨태실(雍正十三年九月十十九日丑時生翁主阿只氏胎室)’이라고 되어 있고, 뒷면에는 ‘옹정십삼년십일월이십육일진시립(雍正十三年十一月二十六日辰時立)’이라고 음각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무봉리 태봉은 금주리 태봉 터 및 주원리 태봉과 함께 포천시에 있던 것으로 알려진 대표적인 태봉 관련 유적이다. 그러나 현재는 대부분 일제 강점기 일본인에 의해서 자행된 도굴과 그 후의 파괴로 원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