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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명리 가마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0906
한자 吉明里窯址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길명2리 350-5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동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1년 4월 21일연표보기 - 세종 대학교 박물관에서 길명리 가마터 지표 조사 시작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1년 5월 10일연표보기 - 세종 대학교 박물관에서 길명리 가마터 지표 조사 종료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2년 07월 04일연표보기 - 길명리 가마터 문화재청에서 발굴 허가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2년 08월 13일연표보기 - 길명리 가마터 기전 문화재 연구원에서 발굴 조사 착수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2년 11월 18일연표보기 - 지장물 미해결 및 동절기를 대비해 길명리 가마터 조사 중지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3년 03월 24일연표보기 - 길명리 가마터 조사 재착수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3년 6월 20일, 6월 26일연표보기 - 길명리 가마터에 대한 1차 지도 위원 회의 및 유물 평가 회의 개최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3년 6월 20일, 6월 26일연표보기 - 길명리 가마터에 대한 2차 지도 위원 회의 및 유물 평가 회의 개최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3년 07월 25일연표보기 - 길명리 가마터에 대한 조사 완료 및 현장 철수
소재지 길명리 가마터 소재지 -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길명 2리 350-5지도보기
성격 가마터

[정의]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길명 2리에 있는 조선 후기 흑유자 가마터.

[개설]

흑유자(黑釉磁)는 유약에 다량의 철분이 포함되어 있어 도자기의 표면이 흑색이나 암갈색을 띠는데, 수량은 적으나 고려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 제작되어 왔다. 흑유자가 출토된 대표적인 가마터는 조선 전기의 공주 학봉리, 진해 두동리, 고창 용산리, 장성 추암리 등이 있다. 조선 후기에는 울산 상삼정리, 충주 구룡리 등으로 대부분 분청이나 백자와 같이 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길명리 가마터는 다량의 흑유자와 소량의 백자를 생산하였던 점으로 보아 지금까지 알려진 조선 시대 가마터 중에서 흑유자를 전문적으로 생산한 가마터로는 처음으로 발굴 조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위치]

길명리 가마터금주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지맥의 남동쪽 비탈면 끝자락으로 해발 고도 156~168m에 해당한다. 유적의 남동쪽 전방으로는 작은 분지형 들판이 있다. 마을과 농경지가 형성되어 있고 그 사이로 명덕천과 합류하는 지류가 흐르고 있다. 유적 후방으로는 금주산의 지맥들이 유적을 감싸듯 형성되어 있어 자기의 태토(胎土)나 가마에 소요될 땔감, 물 공급 등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주소지는 포천시 일동면 길명 2리 350-5번지이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길명리 가마터는 서울 지방 국토 관리청이 경기 북부 지역의 교통난 해소를 위해 건설하기로 계획한 포천 일동~영중 간 도로 확장·포장 공사가 계기가 되어 확인된 유적이다. 계획 도로 구간에 대해 2001년 4월 세종 대학교 박물관이 지표 조사를 하였으며, 조사 결과 추정 고인돌과 유물 산포지 3개소 등 4개소의 유적이 확인되어 시굴 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서울 지방 국토 관리청과 효자 건설은 조사된 유적 가운데 길명리 가마터와 건물지에 대한 문화재 조사 계획을 수립하여 기전 문화재 연구원에 문화재 시굴 및 발굴 조사 참여를 의뢰하였다.

길명리 가마터는 원래 40~50년생 밤나무를 비롯한 묘목과 밭작물을 재배하던 곳이다. 유적은 조사가 이루어지기 전에 이미 유적 하단부가 배수구 공사로 절단되어 가마와 남·북쪽 폐기장, 일부 소성 유구(燒成遺構)의 단면이 노출되어 있었고 절개면의 붕괴가 계속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어서 긴급히 조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기전 문화재 연구원에서는 가마 유적은 곧바로 발굴 조사를 하고, 주변의 추정 건물 터 등은 유적 성격 파악을 위한 시굴 조사를 병행하도록 하는 조사 계획을 수립하여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2002년 8월 13일 문화재 시굴·발굴 조사에 착수하였다. 현장 조사는 일단 추정 건물 터 지역에 대한 시굴 조사와 폐기장 및 일부 가마 부속 유구 등의 조사가 2001년 10월 말에 일단락되었다.

그 외 가마 유구 등은 토지와 지장물(支障物) 보상 문제로 조사 진행에 차질이 생겨 2002년 11월 18일 조사 중지를 요청하였다. 이후 기전 문화재 연구원은 보상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2003년 3월 24일 조사를 재착수하여 6월 20일과 26일에 현장 지도 위원 회의를 개최하여 자문을 구하고 실측과 보완 조사, 유물 분류를 마친 후 2003년 7월 말 현장에서 철수하였다.

발굴 조사에서 확인된 길명리 유적의 유구는 흑유자 가마 1기와 공방지로 추정되는 주거지 1기, 폐기장 2개소, 원형 수혈 3기, 구들 1기, 소성 유구 5기, 적석 유구 1기, 석렬 1기 등으로 가마를 제외한 다른 유구는 잔존 상태가 좋지 않아 전모를 알 수는 없지만 유적 범위가 넓지 않고 출토 유물도 한정된 시기에 집중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어 자기 제작과 관련된 주변 분위기를 추측할 수 있었다.

길명리 유적의 출토 유물은 주로 가마, 폐기장과 주거지, 구들, 적석 유구, 원형 수혈, 석렬과 주변 지표에서 수습된 것이다. 출토 유물은 크게 흑유자·백자·도기·요도구(窯道具) 등으로 구분되며, 모두 가마가 운영되던 당시에 폐기된 것들로 3,348여 점에 이른다. 출토 유물 가운데 대다수[2,830점, 98.2%]가 폐기장에서 출토되었다. 폐기장 출토 흑유자는 총 2,689점[94.1%]으로 길명리 가마터의 주요 생산품이기에 길명리 가마터를 흑유자 가마터로 규정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 후기 가마터에 대한 조사는 지금까지 백자 가마 중심으로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 왔고 최근에도 많은 수의 백자 가마가 전국적으로 조사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길명리 가마터의 발굴이 이루어진 것은 흑유자 단독 가마로서 가마 자체에 대한 연구뿐만 아니라 동시기 백자 가마와 비교 자료가 된다. 추후에 이러한 흑유자 가마터와 출토품 등의 고고학적인 자료 축적을 통해 활발한 흑유자 연구를 기대할 초석이 된다는 점에서 길명리 가마터의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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