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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1027
한자 李敬一
이칭/별칭 원회(元會)|청헌(聽軒)|효정(孝定)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방축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우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758년 - 이경일 이원익의 사손으로 온릉 참봉 출사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09년 - 이경일 결혼 50주년 회근연 행함
출생 시기/일시 1734년 8월 23일연표보기 - 이경일 출생
몰년 시기/일시 1820년 1월 18일연표보기 - 이경일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20년 3월 23일 - 이경일 효정 시호 받음
추모 시기/일시 1820년 3월 26일 - 이경일 효행으로 정려
출생지 이경일 출생지 -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방축리
묘소|단소 이경일 묘소 -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가산리 시우동
사당|배향지 이경일 효자 정려 - 서울특별시 종로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경주(慶州)
대표 관직 좌의정

[정의]

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원회(元會), 호는 청헌(聽軒). 이항복(李恒福)의 6세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삭령 군수를 지낸 이세장(李世章)이고, 할아버지는 사도시 첨정을 지낸 이홍좌(李弘佐)이다. 아버지는 증 이조 참판 이종열(李宗說)이나 의빈부 도사를 지낸 이종악(李宗岳)에게 입양되었다. 부인은 학생 박사은(朴師殷)의 딸인 반남 박씨(潘南朴氏)이다. 자녀는 3남으로 이영수(李永受), 이진규(李進奎), 이병규(李秉奎)이다.

[활동 사항]

이경일(李慶一)[1734~1820]은 문충공 이원익의 사손(祀孫)으로 온릉 참봉에 임명되었다. 이후 여러 번 자리를 옮겼다가 사옹원 직장이 되었고, 그 후 광흥창 주부를 지내고 북부 도사를 거쳐 덕산 현감에 임명되었다. 1775년(영조 51) 문과 정시에 급제하여 이듬해 예조좌랑을 역임하고 사간원 정언을 거쳐 강진 현감으로 나아갔다.

1777년(정조 1) 홍문관 수찬이 되어 『영조실록(英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교리로 승진하여 문신 선전관과 남학 교수(南學敎授)를 겸하였다. 다시 군자감과 봉상시 정을 거쳐 장령으로 옮겼고, 사복시 정에 임명되었다. 또다시 부응교, 응교를 거친 뒤 영광 군수로 나아갔다가 들어와 시강원 필선이 되었고, 관서(關西)의 경시관(京試官)으로 파견되었다.

1786년(정조 10) 동부승지를 역임하고, 병조와 형조의 참의를 거쳐 대사간이 되었다가 동래 부사로 나갔다. 1788년(정조 12) 승지가 되었고, 대사성을 거쳐 광주 부윤을 지내고 1791년(정조 15) 황해도 관찰사로 제수되었다. 1793년(정조 17) 가선대부에 올라 호조 참판이 되었고 오은군(鰲恩君)의 봉호를 세습하였다. 그 후 병조와 형조의 참판을 지내면서 동지의금부사와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겸하였다가 예조 참판으로 옮겼고, 다시 병조와 공조의 참판을 지내며 동지경연사를 겸하였다.

이조 참판에 제수되고 충훈부 유사당상이 되었으나, 작은 일에 연관되어 영흥 도호부사로 나아갔다. 1799년(정조 23) 오래도록 외직에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도총관에 의망하였다.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라 공조 판서가 되었고, 좌참찬에 제수되어 비변사 제조를 겸임하였다. 1801년(순조 1) 형조 판서에 임명되고, 이어서 광주 유수를 거쳐 한성 판윤을 지냈다. 1802년(순조 2) 순조순원 왕후의 가례를 행할 때 부사로서 예를 잘 마치어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1803년(순조 3)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고 동지성균관사를 겸하였다. 대사헌을 거쳐 병조 판서가 되었다가, 다시 화성 유수가 되었다. 1804년(순조 4) 우의정에 올라 내의원 도제조를 겸하였다.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으나 계속 사직을 청하여 1808년(순조 8) 치사를 윤허 받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학문과 저술]

저서에 시문을 모은 『청헌유고(聽軒遺稿)』가 있다.

[묘소]

묘는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가산리 시우동에 있으며, 정경부인 반남 박씨와 합장하였다. 묘 앞에는 오석(烏石)[흑요암]으로 된 묘표가 서 있는데, “좌의정 오은군 봉조하 이공지묘(左議政鰲恩君奉朝賀李公之墓)”라고 적혀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효정(孝定)이다. 1820년(순조 20) 계모를 효성으로 극진히 섬긴 효행을 기려 그가 거주하던 서울 장흥방[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적선동과 내자동에 걸쳐 있던 마을] 집에 효자문(孝子門)이 내려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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