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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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中里里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중리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조현미 |
[정의]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에 속하는 법정리.
[개설]
중리리의 서쪽은 의성읍의 소재지인 후죽리와 접하고 있어 관공서와 학교가 있으며, 동쪽은 구릉성 산지 사이의 계곡에 있는 농촌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 마을로는 중리, 창동, 성조동이 있으며, 중리 1리, 중리 2리, 중리 3리의 행정리로 구성되어 있다.
[명칭 유래]
중리라는 명칭은 자연 마을 중리의 이름에서 따왔다. 구전되어 내려오는 바로는 의성의 중심 마을이란 데서 유래되었다고 하며, 조문성(召文城)이 생긴 뒤 그 성(城) 중앙에 있는 마을로 판명되어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자연 마을로는 중리, 창동, 성조동이 있다. 창동(倉洞)은 1448년(세종 30)에 정부의 빈민 구제 정책의 하나로 곡물 대여 기관 구실을 하는 사창(社倉) 설치 제도에 호응하여 이곳에도 커다란 창고가 세워진 뒤부터 불리게 된 이름이라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 창고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성조동(聖造洞)은 속칭 여시계(麗時計)로 불리는데, 개철래란 밭골에 고려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돌로 된 시계가 있어 고려의 끝 자에 시계를 붙여 일컬어진 이름이다. 조선 말에 이 시계는 어떤 성인(聖人)이 만든 것이라 하여 성조동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형성 및 변천]
본래 의성군 북부면의 지역으로서 중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창동, 성조동을 병합하여 의성군 의성면 중리동이 되었다. 1940년 11월 1일 의성면이 의성읍으로 승격하여 의성군 의성읍 중리동이 되었으며, 1988년 5월 1일 군 조례 제1225호에 따라 중리리로 개칭되었다.
[자연환경]
중리리의 서쪽에는 중리 1리와 중리 2리가 있고 동쪽에는 중리 3리가 있다. 중리 1리와 중리 2리는 뒤로 성조천이 보이고 남쪽으로 오토산이 건너다보이는 15° 안팎의 경사지에 이루어진 마을이다. 읍 중심가 주변이며, 그 외곽 지대에는 양계를 주업으로 하는 농가들이 형성되어 있고, 남쪽에는 비농가 주택 지구가 있다. 중리 3리는 읍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약 3㎞ 떨어진 점곡, 옥산행 길목에 자리 잡은 산간 마을로 농업과 과수원을 주로 경영하는 농가가 주를 이룬다. 해발 고도 300m 산지 사이로 좁고 길게 형성된 계곡을 따라 수많은 계류가 합류하여 서쪽으로 흐르며, 그 연변에 경작지와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계곡 상류부에서 성조, 여시계, 한골 마을로 이어지면서 점차 고도가 낮아진다.
[현황]
2011년 12월 31일 현재, 면적은 10.34㎢이며, 총 957가구에 2,362명[남자 1,155명, 여자 1,207명][외국인 제외]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으로 황룡리와 구암리, 북쪽으로 상화리, 북서쪽으로 업리, 서쪽으로 후죽리, 남쪽으로 상리리와 면하고 있다. 자연 마을로는 중리, 창동, 성조동이 있으며, 중리 1리, 중리 2리, 중리 3리의 행정리로 구성되어 있다. 중리 1리·중리 2리는 도농 복합 지역이며, 중리 3리는 산간 계곡에 자리한 농촌으로서 밭농사와 과수를 재배하고 있다.
대구 지방 법원 의성 지원, 대구 지방 검찰청 의성 지청, 경상북도립 의성 공공 도서관, 의성 종합 운동장, 의성 공업 고등학교, 의성 고등학교 등이 소재하고 있다. 문화 유적으로는 중리 1리에 진민사 유지 비각(鎭民祠 遺址 碑閣)이 있다. 지방도 914호선이 마을을 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