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9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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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宗良 |
이칭/별칭 | 성필(聖弼),금파(錦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출생 시기/일시 | 1804년 - 박종량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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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876년 - 박종량 사망 |
출생지 | 월촌(月村) -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동변3리 |
거주|이주지 | 단애실[단의실, 단애] -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동변2리 |
수학|강학지 | 금파정(錦坡亭) -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동변리 1003 |
묘소|단소 | 박종량 -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장흥리(長興里) 망실(望實) 고개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반남(潘南) |
[정의]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학자.
[가계]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성필(聖弼), 호는 금파(錦坡). 박상삼(朴象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박성현(朴成玹)이고, 아버지는 박경원(朴敬源)이고, 어머니는 신진환(申震煥)의 딸 아주 신씨(鵝州 申氏)이고, 부인은 김혁운(金赫運)의 딸 의성 김씨(義城 金氏)이다.
[활동 사항]
박종량(朴宗良)[1804~1876]은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이 의심스러운 부분의 뜻을 물으면 반드시 깊이 생각하고 궁구하여 뜻을 완전히 이해하고 나서야 그만두었다 한다. 과거 공부를 함에 공거문(公車文)[응시(應試), 응제(應製), 소장(疏章) 등의 시문을 총칭] 짓기를 일삼았는데 한번이라도 격식에 지나침이 없었다. 그리고 정암(定庵) 김양정(金養楨)의 문하에 들어가 변의(辨疑)[의심스러운 대목을 살피어 밝힘]하기 어려운 것을 물었다. 1823년에 부친의 상을 당하였고, 1840년에 모친의 상을 당함에 삼년동안 내실에도 들지 않고 육즙도 먹지 않았으며, 성묘하는 일이 아니면 여막을 나가지 않는 등 집상(執喪)을 함이 매우 지극하였다.
1846년 봄에 경시(京試)를 볼 때에 어떤 이가 미리 유출된 시제를 보여주며 먼저 시를 지어놓을 것을 권하자, 끝내 시제가 걸린 뒤에야 시문을 지었다 한다. 경시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기 전에 우연한 실화로 인해 가산이 전소되었으나 “다행히도 사람이 상하지는 않았으니 재물에 어찌 구애받음이 있겠는가”라고 하고는 박종익(朴宗益), 박종학(朴宗學) 두 동생들과 함께 의성군 점곡면 단애(丹厓)[동변 2리]에 몇 칸의 집을 얽고는 ‘금파정(錦坡亭)’이라고 편액하고, 자질(子姪)들이 학문을 연마하는 곳으로 삼았다.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이 정자를 지은 뜻은 제군들과 문학을 강론하여 덕있는 인재를 교육해서, 궁(窮)할 때는 효제 충신 지사가 되고 달(達)할 때는 경륜 고명 지신(經綸 顧命 之臣)을 기르고자 한다” 하며 장학의 충정을 밝혔다. 종족간의 의를 돈독히 하여 종족 중에 혼기를 놓친 사람이 있으면 자신의 재물을 내주어 때를 놓치지 않게 하였으며, 혹은 조금이라도 재주가 있어 더불어 할 만하나 가난하여 배울 수 없는 자에게는 반드시 양식을 보태주어 학문을 성취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월촌[의성군 점곡면 동변 3리]의 옛 거주지에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아 문족(門族)들과 함께 월록 서당(月麓 書堂)을 짓고, 이 서당에서 문족들의 화수회(花樹會) 등을 개최하고 항상 경계하여 문행이 끊어지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흥선 대원군의 원사 훼철령으로 철폐되어서 이를 다시 복원하기 위하여 상소를 올렸지만 실패하였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는 4권 1책의 『금파유고(錦坡遺稿)』가 있다.
[묘소]
묘는 의성군 점곡면 장흥리 망실(望實) 고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