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1171 |
---|---|
한자 | 蠶業 |
이칭/별칭 | 양잠업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현경 |
[정의]
경상북도 의성 지역의 산업 중 누에를 사육하여 고치를 생산하는 업종.
[개설]
잠업은 고대로부터 의복을 생산하기 위한 우리 민족의 중요한 산업의 하나로 발전해 왔다. 우리나라 잠업의 역사는 삼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이미 이때부터 양잠에 대한 지식과 기술이 상당히 발달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삼국 시대에도 고관의 의복이 거의 비단으로 지어졌을 정도로 양잠이 크게 장려되었다.
잠업은 1969~1979년대 전성기를 지나면서 사양 산업으로 전락하였으나, 1990년 중반부터 누에 가루와 누에 동충하초, 뽕나무 열매, 뽕잎을 이용한 다양한 건강 기능 식품이 개발되면서 양잠은 사양 산업에서 고부가 가치 산업으로 변화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417년(태종 17)에 의성현 북쪽 10리 사진리에 잠실을 설치하고 책임자인 감고를 두어 잠업 증산에 노력하였고, 1425년(세종 7) 의성 잠실 감고 전부사 정 장영계를 서용하여 권장하라 하라고 명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볼 때 조선 시대 의성에서는 잠업이 매우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금성면 명덕리 상리(桑里) 마을은 마을 주위에 예부터 뽕나무 밭이 많아 누에를 많이 쳐서 그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는 유래가 전한다. 더 나아가 조문국 시절 왕국의 동남산 형태가 잠두와 비슷한 것을 발견하고 양잠을 장려하여 잠사를 불러 상전을 개발하고 산명을 잠산, 상전을 상리라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후 왕은 백성들에게 잠업을 권장하여 잠업이 발달하게 되었으며 인접 국가에서 와서 시찰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잠종의 저장에 불편을 느껴 조문국 동쪽인 빙혈(현 빙계 계곡빙혈)과 풍혈에 저장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이를 보면 의성 지역에서 이른 시기부터 잠업이 활발히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일제 강점기 때 1908년에 발견된 춘산면 서원동 풍혈과 빙혈을 개수하여 하추잠종 저장 장소로 사용하기도 하였다는 사실은 이러한 추측의 가능성을 더욱 높여준다.
[변천]
『한서』 지리지, 『동국통감』 등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이미 삼한 시대부터 양잠을 널리 행해져 오다가 백제에는 양잠 기술을 바다 건너 일본으로 전해주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 시대에는 궁중에서부터 농촌 부녀자에 이르기까지 널리 보급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한국 잠업 조사 복명서(韓國蠶業調査復命書)』 등을 통해 조선의 기후가 일본 보다 잠업에 적합할 뿐만 아니라 적은 자본으로 부녀자의 노동력까지 착취할 수 있었다. 1913년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에 원잠종 제조소를 창설하여 원잠종의 제조와 배부, 신품종 육성과 잠업 전반에 대한 시험과 조사를 하도록 하여 본격적인 잠업 증산 시대로 전환되었다.
1914년 전국의 뽕밭 면적 3,954ha, 소잠량 28만 3367상자에서 1939년에는 뽕밭 면적 8만 3783ha, 소잠량 111만 8116상자로 급격히 증가하였다. 그러나 8·15 해방과 6·25 전쟁의 비극, 정국의 불안 등으로 1959년 전국 뽕밭 면적은 3만 4970ha, 소잠량은 30만 1431상자로 급격히 감소하였다.
1962년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과 잠업 진흥 정책으로 1969~1979년대 전성기를 맞았다. 의성 지역 잠업 실태를 살펴보면, 1976년 양잠 농가는 8,650호, 소잠량은 1만 9757상자로 증가되었으며, 양잠 지역으로는 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 신평면, 안평면, 비안면이 발달한 반면, 단촌면, 점곡면, 가음면, 단밀면, 옥산면이 낙후되었다. 이는 뽕나무가 잘 자라는 조건과 대체 작물 우선 순위의 결과이다. 양잠 산업이 전성기를 맞아 의성 지역에는 상신 제사와 태성 제사가 설립되었다. 상신 제사는 가동 직기 160대, 종업원 64명, 일일 생산량은 원료잠 250kg과 생사 100kg이며, 태성 제사는 가동 직기 80대, 종업원 48명, 일일 생산량은 원료잠 230kg과 생사 90kg이다.
1980년대 접어들면서 석유 파동에다 나일론·폴리에스터 등 합섬 섬유의 출현, 노동력 부족 등으로 양잠 산업의 경제성이 떨어지자 1980대 중반부터 산업 구조가 개편되면서 뽕나무 밭은 경제성이 높은 마늘, 고추, 사과, 자두, 복숭아 등 대체 작물 재배지로 전환되었으며, 제사 공장들도 문을 닫으면서 1990년대 이후에는 잠업 농가를 찾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현황]
양잠 산업은 전성기인 1969~1979년대에는 수출에 큰 기여를 하는 등 중요 산업이었으나 1980년대 중반 이후 중국에서 값싼 생사가 수입되고, 화학 섬유의 등장으로 인해 급격히 하락세를 겪었다. 특히 1999년 「잠업법」이 폐지되면서 관련 조직과 기구가 축소되는 등 사양화의 길을 걷고 있다.
2012년 현재 의성 지역 양잠 농가는 20농가 정도이며, 당뇨병 예방에 도움이 되는 건조 누에 28상자[70kg]와 동충하초를 생산하는 정도이다. 그러나 1990년 중반부터 항당뇨 식품인 누에 가루와 누에 동충하초, 뽕나무 열매, 뽕잎을 이용한 다양한 건강 기능 식품이 개발되고, 2009년 ‘기능성 양잠 산업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정과 정부의 다양한 지원 정책으로 양잠은 사양 산업에서 고부가 가치 산업으로 변화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1980년 중반 이후 의성 지역의 양잠 산업은 침체 일로에 있으며 잠업 전업 농가가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최근에는 뽕, 누에, 오디를 활용한 다양한 기능성 제품을 개발함으로써 양잠은 사양 산업이 아니라 미래 성장 산업이 될 수 있으므로 잠업에 대한 장기적인 계획 수립과 고부가 가치 제품 개발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