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5008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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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儒敎 |
영어의미역 | Confucianism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북도 울릉군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장두민 |
[정의]
경상북도 울릉군에서 이루어진 유학과 관련된 제반 활동.
[변천]
울릉도에서 유교는 1902년 7월 14일 『황성신문』에서 새로 부임한 울도군수 심흥택이 향교 건축을 시작했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향교 건축은 당시 사회에 유교적 교육과 교화를 담당하는 중추적 기관이 생겼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를 담당할 수 있는 인적 배경이 된다는 것을 대변해 준다. 그리고 당시 군수가 향교를 설립하고자 하였음은 항교 운영에 필요한 유학자들이 울릉도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바이다.
개척 이후 울릉도 곳곳에서 서당이 건립되어 교육을 담당한 사실을 보았을 때도 유교가 울릉도에 영향을 주었으리란 점은 분명하다. 서당의 훈장은 반드시 유학적 소양을 지닌 인물이어야만 강습이 가능했다. 왜냐하면 서당 교육의 교재가 『천자문』, 『동몽선습』, 『통감』, 사서삼경, 『사기』를 비롯하여 그 수준에 따라 송문, 당률 등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 예로 사동서당(沙洞書堂)을 건립한 김광호(金光鎬)는 울릉도 개척 당시 교육 공로자 중 한사람으로 입도 이전 육지에서 사헌부 정6품 관직에 해당하는 감찰을 역임했다 한다. 이는 그의 한학 실력이 출중했다는 반증으로 그의 경력은 입도 이후 서당과 1910년 건립한 신명학교 학생들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또한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저동1리에 있었던 중저서당(中苧書堂)은 울릉도에서 가장 오랫동안 존속하면서 많은 문도를 배출하였다. 일제강점기 중기 『동몽선습』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자 ‘유몽선습’이라고 속여서 계속 가르쳤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개척 초기부터 일제강점기 말까지 기초적인 유교 교육이 서당을 위주로 보급되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