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036 |
---|---|
한자 | 儒敎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집필자 | 조영화 |
[정의]
경상북도 영천 지역에서 행해지는, 중국 공자를 시조로 하는 전통적 학문과 종교적 의례 및 활동.
[개설]
유교는 중국 공자의 가르침에서 시작된 도덕 사상이다. 인(仁)을 기본 이념으로 삼고,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일종의 윤리학이며 정치학을 내재한 종교 개념으로,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와 일본·베트남 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유교가 한국에 전래된 시기는 삼국 시대를 그 기원으로 삼는다. 이후 고려 시대인 992년(성종 11)에 비로소 국자감(國子監)을 세웠고, 문종 때 최충(崔沖)이 구재(九齋)를 설치하고 학도를 가르쳤으며, 고려 말에 안향(安珦)이 국학을 세우고 대성전을 건립하여 유교 부흥에 힘썼다.
조선 시대에는 개국 초부터 유교가 크게 발전하여 고려 말 학자인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종직(金宗直)과 그의 문인들인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노수신(盧守愼) 등이 학문의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후 거듭되는 사화(士禍)로 유학자들은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과 후진 양성에 전념하게 되었는데, 서경덕(徐敬德)·조식(曺植)·김인후(金麟厚) 등은 그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으며, 특히 서경덕은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주장함으로써 우리나라 주기론(主氣論)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 후 이황(李滉)·이이(李珥) 등 많은 유학자가 배출되어 한국 성리학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는데, 이황은 사단칠정(四端七情)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였고, 그 학설은 일본의 주자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쳐 동양 사상에서 한국의 성리학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하였다.
한편, 임진왜란 이후로는 현실의 정치·경제·사회 문제로 관심을 돌리면서 새로운 경향의 유학인 실학(實學)을 탄생시켰으니, 그 대표적 인물로는 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박지원(朴趾源) 등이 있다.
[내용]
영천 지방에서는 고려 말부터 유학 사상을 대체로 다른 지방보다 빨리 받아들였다. 당시 정몽주(鄭夢周)를 비롯하여 조신충(曺信忠)·이석지(李釋之)·박진록(朴晉祿)·이자용(李子庸)·정광후(鄭光厚)·이감(李敢)·김보(金普)·이응(李膺) 등이 관직에 있으면서 높은 학문으로 지방민들에게 유교의 교육과 정치 이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다.
조선 초 당시 영천 지방의 학자들은 지역적으로나 학문적 교류가 훈구파보다는 신진사림과 깊은 연관 관계를 맺고 있었으므로, 정치나 관직보다는 선비로서 스스로 학문과 인격을 쌓으며 후학 양성에 몰두하였다. 간혹 등관한 사람들도 중도에 낙향하는 예가 많았다. 사색당쟁이 한창 치열할 때도 실권한 남인 계열에만 머물러 있었다. 이러한 처신은 초야에서 학문만 연구하는 사람이 진정한 인격자 또는 학자라고 여기는 지역적 기풍과 상당한 관련이 있었다.
성리학의 학풍이 조선 사회를 지배할 때 영천 지방에서는 퇴계의 영향을 받은 노수(盧遂)·김응생(金應生)·정윤량(鄭允良)·조호익(曺好益) 등이 후학 양성에 많은 공을 남겼으며, 특히 조호익은 영남학파의 대통을 이은 석학으로서 박돈(朴潡)·서사원(徐思遠)·손우남(孫宇男) 등 영천의 후학뿐만 아니라 관서 지방에서는 절대적 학자로 추앙받았다.
또한 임진왜란 때 영천으로 이주한 장현광(張顯光)이 권봉·조종악·정사진·정사상 등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평생을 학문에만 몰두한 정만양(鄭萬陽)은 정간·정중기·조현명·이유·신준·안경시·박평 등 출중한 선비를 문하생으로 두었다. 또, 한강(寒岡) 정구(鄭逑)는 서강인·손항·노각·박현 등의 선비를 배출했으며, 정중기(鄭重器)는 서필규·신명두·조상옥 등을 배출하였다.
한편, 실학의 논리를 닦은 이형상(李衡祥)은 서유민·윤천각·성하구·손한추·노수갑·양대민·조선적 등의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이익(李瀷)의 문하생이었던 안경설(安景說)의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그 외 당대를 풍미한 서거정(徐居正)·조상치(曺尙治)·박영손(朴榮孫)·안증(安增)·윤긍(尹兢) 등의 학문도 이 고장의 후학에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영천의 학자들은 국가가 위험할 때 빛이 났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권응수(權應銖)와 정세아(鄭世雅) 부자, 정담(鄭湛)·정대임(鄭大任)·정대인(鄭大仁) 등 3,500여 명이 출전한 창의정용군(倡義精勇軍)의 복성(復城) 전투가 바로 그것이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 3대 대첩에 못지않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특히 정담은 뛰어난 전략을 세워 제갈공명과 같다는 감탄을 자아냈으며, 정세아의 큰아들은 경주성 탈환 전투에서 아버지를 구하고 자신은 장렬하게 전사해 충효정신의 귀감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내용을 기리기 위하여 영천에서는 고천서원(古川書院)을 건립하여 이들을 추모하고 있다.
그 외에도 영천에는 영천향교와 신녕향교를 비롯한 향교와 많은 서원 및 사우가 건립되었는데, 도잠서원·용계서원·도계서원·대천서원·회계서원·횡계서원·백학서원·송곡서원·귀천서원·무원서원·덕강서원·우고서사·창대서원·창주서원·성남서원 등이 현존하고 있다. 그 외에도 입암서원·경덕사·상덕사·위양공사 등 많은 서원과 사우가 기록에 남아 있다. 특히 백학서원은 영천 지역 최초의 근대학교로 의미가 있다.
이와는 별도로 영천에서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초급 학교 기관인 서당이 각 마을과 문중마다 조선 후기까지도 유지되면서 유학의 가르침을 이어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