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7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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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丁時翰 |
영어공식명칭 | Jeong Si-han |
이칭/별칭 | 군익(君翊),우담(愚潭)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출생 시기/일시 | 1625년 - 정시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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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50년 - 정시한 생원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57년 - 정시한 학행으로 천거 |
활동 시기/일시 | 1675년 - 정시한 정릉참봉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704년 - 정시한 첨지중추부사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707년 - 정시한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21년 - 정시한 도동서원 제향 |
출생지 | 정시한 출생지 - 서울특별시 |
거주|이주지 | 정시한 피난지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
거주|이주지 | 정시한 이주지 -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
묘소|단소 | 정시한 묘소 -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 산 95-1 |
사당|배향지 | 도동서원 -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나주(羅州) |
대표 관직|경력 | 첨지중추부사 |
[정의]
조선 후기 영주 지역에 거주했던 문신.
[개설]
정시한(丁時翰)[1625~1707]은 숙종 연간 영남지방에서 활동한 유학자이다. 병자호란 때 풍기 지역으로 피난하였으며, 한동안 부석사에 머물기도 하였다.
[가계]
정시한의 자는 군익(君翊), 호는 우담(愚潭),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대사헌을 지낸 정윤복(丁胤福)[1544~1592], 할아버지는 정호관(丁好寬)[1568~1618], 아버지는 관찰사 정언황(丁彦璜)[1597~1672], 어머니는 직제학 조정립(趙正立)[1560~1612]의 딸 횡성조씨(橫城趙氏)이며, 부인은 응교 류영(柳穎)[1603~1646]의 딸 진주류씨(晉州柳氏)이다. 경상도 영천군(榮川郡) 줄포[지금의 영주시 상줄동]에 입향한 정언숙(丁彦璛)[1600~1693]의 숙부가 정시한의 할아버지인 정호관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정시한은 어린 시절부터 여러 차례 영주 지역을 방문하였다.
[활동 사항]
정시한은 1625년(인조 3) 한양 회현동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13세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어머니를 모시고 경상도 풍기군 희여골[지금의 영주시 풍기읍 백리]로 피난하였다. 1648년(인조 26) 아버지가 회양부사로 있을 때 금강산을 유람하였으며, 1649년 안동부사로 부임한 뒤에는 안동에서 학문을 공부하였다. 1649년 겨울 원주 법천에 우거하였으며, 1650년 봄 은휴정(恩休亭)을 짓고 부모를 봉양하였다.
정시한은 1650년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1657년(효종 8) 알성시에 응시했으나 시권을 내지 않았다. 이후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원주에서 농사와 학문에 힘썼다.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64년(현종 5) 우로(優老)의 은전으로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691년(숙종 17)에 「시폐육조」를 상소하였는데, 그 말이 대체로 공명정대하여 시사(時事)에 요긴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폐비 민씨의 일을 논급하여 왕의 격노를 사서 관직을 삭탈 당하였다. 본래 남인에 속하였으나 자당(自黨)의 해로운 일이라도 기탄없이 말하였다.
[학문과 저술]
정시한의 저서로 『우담집(愚潭集)』과 『산중일기(山中日記)』가 전한다.
[묘소]
정시한의 묘소는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 산 95-1에 있다.
[상훈과 추모]
정시한의 묘지명은 문인 이식(李栻)[1767~1837]이 짓고, 묘갈명은 이익(李瀷)[1681~1763]이 지었다. 1721년(경종 1) 원주 도동서원(道東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