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12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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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積良洞 |
영어음역 | Jeongnyang-dong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적량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종길 |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에 속하는 법정동.
[명칭유래]
여수국가산업단지의 시초가 되었던 호남정유가 최초로 들어섰던 적량동은 고려시대부터 ‘적량부곡(赤良部曲)’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온다. 광양만의 풍부한 수산자원과 진례산을 배경으로 한 기름진 땅에 남해의 따뜻한 기후는 우리나라 어느 곳보다 살기 좋은 자연환경이었다. 삼일포향·적량부곡·진례부곡 등 삼일 지역엔 유난히 많은 향과 부곡의 이름이 전해온다. 고려시대의 향·소·부곡은 고려의 건국에 반대했던 지역이었다는 주장도 있어, 김총을 선두로 했던 견훤의 세력 아래 있던 여수에서 삼일 지역이 그 중심에 있었다.
여수국가산업단지가 건설되면서는 삼일 지역에 산재해 있던 고인돌 유적의 발굴이 많이 이루어졌는데, 비파형청동검 등의 청동기 유물과 옥으로 된 부장품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적량동에 전해지는 옛 지명에는 ‘누래등’이라는 이름이 있다. ‘누래’ 또는 ‘누리’라는 옛말은 노적가리를 일컫는 말로, 식량을 쌓아놓았다는 뜻의 ‘적량(積糧)’과 일치한다. 그러나 전해지는 한자 기록이 ‘적량(赤良)’이어서 혼란이 있다.
적량동 안에 있던 작은 마을로는 위 지역과 아래 지역으로 나뉘어 상적마을과 하적마을이 있었다. 마을이 구멍처럼 깊숙이 들어온 만(灣)에 자리하여 군영개로 알려진 군장(軍藏)마을은 임진왜란 때 군인들이 숨어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으로 알려졌다.
정유공장이 건설되면서 1970년대부터 마을이 이주하기 시작하여 1988년 이주를 끝냈다. 상적마을이 있던 마을 어귀에 망향의 탑을 세웠다. ‘정월 대보름 추석 한가위……다정한 정든 숲들 정자나무 모두를 찾을 길 없네!’라는 탑의 글귀에서 고향을 떠나던 이주민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형성 및 변천]
조선시대에는 순천부 삼일면이었다가 1949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여천군 삼일면이 되었다. 1976년 9월 1일 전라남도 여천지구출장소 삼일면으로 조정되었고, 1986년 1월 1일 여천시의 승격으로 여천시 삼일동이 되었다. 1998년 4월 1일 3여 통합으로 삼일면 지역이었던 월내·중흥·적량·화치·평여 등이 통합되어 여수시 삼일동이 되었다.
[현황]
2022년 9월 6일 기준, 총 1세대에 인구 1명[남자 1명]의 주민이 있다.
여수반도의 북동쪽으로 묘도와 경계하고 있는 적량동은 현재 GS칼텍스 여수공장이 들어선 곳으로, 마을은 모두 이주하고 GS칼텍스·삼남석유·LG화학 등 정유공장과 석유화학산업체만 있는 공장 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