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30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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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仁植 |
영어음역 | Kim Insik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죽포리 1643[죽포1길 21-13]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병호,이재훈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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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죽포리 1643[죽포1길 21-13] |
성별 | 남 |
생년 | 1911년 12월 27일 |
본관 | 김해 |
[정의]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인식은 1911년 12월 27일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죽포리 1643번지[죽포1길 21-13]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김영환이고, 어머니는 김순언심이며, 의인·효자인 김경식의 형이다.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하였고, 여수 적색노동조합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활동사항]
김인식은 여수보통학교[현 여수서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국비장학생으로 선발되어 1928년 전라남도 공립사범학교[현 광주교육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전라남도 공립사범학교 2학년 재학 중이던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사범학생들과 반일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갖은 고초를 겪고 회유에도 의지를 굽히지 않아 결국 1930년 3월 퇴학처분을 당하였다.
광주학생운동 후 여수로 내려왔을 때, 여수에서는 여수수산학교 학생들이 식민지 교육 반대 시위를 하다가 여수 보통학교 출신들과 항일조직인 독서회를 조직하고 항일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이때 장평완(張平完) 등의 권유로 당시의 신사상인 사회주의를 수용하여 1930년 3월 하순 독서회에 가입하고 문맹 퇴치 등 교육활동으로 항일운동 강령을 주창하였다. 1930년 4월 보통학교의 교사를 하다가, 동년 12월 사직하고 농업에 종사하였다.
1932년 7월 여수 적색노동조합 조직에 가담하였다. 1934년 1월 29일에 여수 지역 최대 항일운동이었던 적색노동조합결성 항일 운동 사건의 주모자로 여수 지역 노동자들의 동맹파업을 주도하며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광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송치되었고 광주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6년 5월 20일경에 첫 공판이 열렸으며 1936년 6월 29일 공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출감하여 통산 약 3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이후 사회주의 항일운동의 한계를 인식하고 1940년 정경심과 결혼, 일본 규슈 후쿠오카로 건너가 대외 정세를 살피고 귀국하였다. 당시 특이한 사회적 요건으로 번창하고 있는 벌교에 안착, 일본과 교차 무역을 시작하여 상당한 재력가가 되어 제재소 등 사업체를 경영하며,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해방 후 서울 종로구 충신동으로 주소를 옮겨 사업 활동을 하다가 6.25전쟁 시, 1.4 후퇴 때 가족을 데리고 여수로 피란을 가던 중 사업체를 살피러 벌교에 홀로 갔다가 행방불명되었다. 이후 정부에서는 1975년 3월 28일에야 사망을 확인하고 제적 처리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김인식의 항일운동의 공적을 확인하고 2008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으며, 광주 학생독립운동기념관에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