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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560
한자 開港期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정을경

[정의]

조선이 서양에게 문화를 개방하였던 1876년부터 1910년까지 충청남도 보령의 역사.

[개설]

19세기 후반 개항기는 안으로는 세도정치에 의한 국정의 혼란과 삼정의 문란에 의한 민생의 파탄으로 민란이 빈번하게 일어났던 시기였으며, 밖으로는 서양 세력이 통상 요구를 강력하게 주장하던 시기였다.

[시대적 배경]

개항기 무렵에는 서양 세력이 중국과 일본의 문호를 개방한 후 조선으로 몰려드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집권한 흥선대원군은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국방력을 강화하였고, 열강의 통상 요구를 거절하는 쇄국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집권 10년 만인 1873년 명성황후 세력에 의하여 하야하게 되었다. 명성황후 세력이 정권을 잡은 후 조선은 개항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통상 개화론자 등의 주장으로 결국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다. 강화도조약으로 말미암아 조선은 굳게 닫혔던 문호를 개방하였고 개항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역사적 사건]

이 시기에는 서양 세력의 개항 요구로 인하여 병인양요, 신미양요,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사건 등이 발생하였다. 흥선대원군은 1866년 병인박해라고 불리는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였고, 이에 9명의 프랑스 신부들과 수천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당하였다. 당시 서울에서 체포된 5명의 신도가 충청남도 보령시 갈매못에서 처형되었는데, 이때 프랑스 신부였던 다블뤼(Daveluy)[1818~1866], 위앵(Luc Huin)[1836~1866], 오메트르(Aumaitre)[1837~1866] 등이 순교하였다.

[의의]

문호 개방 이후 조선은 적극적인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라는 새로운 기구를 설치하였으며, 군사적으로는 종래 5군영을 2영으로 축소하였다.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였으며, 외국 근대 문물을 살펴보기 위하여 일본에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과 미국에 보빙사(報聘使), 청에는 영선사(領選使) 등을 파견하여 세계에 눈을 돌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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