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381
한자 歷史
영어공식명칭 Historic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시대 고대/고대,고려/고려,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최주희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의 역사 시대의 전반적 개관.

[고대]

고대 남양주 지역은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의 삼한(三韓) 중 마한에 속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에 따르면 마한은 50여개의 소국들로 구성되었는데, 남양주 지역은 이 중 고리국(古離國)에 소속되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에 따르면 고구려는 백제의 고리성(古利城)을 점령하였는데, 고리성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된 골의노현(骨衣奴縣)으로 추정된다. 이를 통해 본래 마한에 속했던 남양주 지역은 이후 백제의 영역 안에 재편되었다가 4세기 말에 고구려의 통치 아래 놓였다고 할 수 있다. 이후 6세기 신라 진흥왕이 백제의 한강 유역을 점령하면서 남양주 일대를 신라의 영역으로 점령한 것으로 보인다. 진흥왕은 한강 유역에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는데, 삼국 통일 이후에는 한주(漢州)로 개칭하였다. 남양주 지역은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한주에 소속되어 신라의 지배를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남양주 일대에는 삼국 시대 신라에 의해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불안산성이 현재까지 문화유산으로 전해지고 있다.

[고려 시대]

고려 시대 남양주는 양주 안에 소속되어 있었다. 고려 성종은 지방에 12목을 설치하였는데, 양주(楊州)·광주(廣州)·충주(忠州)·청주(淸州)·공주(公州)·진주(晋州)·상주(尙州)·전주(全州)·나주(羅州)·승주(昇州)·해주(海州)·황주(黃州) 등이 이에 해당한다. 『고려사(高麗史)』 지리지에 따르면 남경유수관 양주는 3개의 속군과 6개의 속현을 가지고 있었다. 이 중 현대 남양주시의 진접읍진건읍 일대에 해당하는 풍양현(豊壤縣)은 고구려 골의노현으로, 신라 경덕왕 때 황양(荒壤)으로 개칭한 후 한양군(漢陽郡)의 영현(領縣)이 되었으며, 이후 고려 초에 풍향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한편 고려 문종 대인 1067년에 남경으로 승격되었던 양주는 현대의 경기도 양주·포천·의정부·수원·인천·시흥·평택·화성·파주·고양·김포·강화·안성·안양 등 경기도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넓은 지역이었다. 고려 말 1308년에 양주는 한양부로 격하되었고, 한양부로 바뀐 양주는 3속군과 6속현을 지배하는 하급 관청으로 지금의 서울·남양주·양주·포천·고양 등 서울과 그 주변 일대만을 다스리게 되었다. 공민왕의 반원 개혁 정치로 인하여 한양부는 남경으로 환원되었다.

[조선 시대]

조선 시대의 남양주는 고려 시대와 마찬가지로 양주 지역 안에 속해 있었다. 1394년 조선 태조의 한양천도로 인하여 1395년에 양주의 일부 지역이 한성부(漢城府)로 분리되었다. 그리고 아전과 민인을 견주(見州)로 옮기고 양주군(楊州郡)으로 명명하였다.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견주는 본래 양주에 내속된 군현 중 하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조선의 지방행정구역은 부윤, 대도호부사, 목사, 도호부사, 군수, 현령, 현감 순서로 등급이 나뉘었다. 조선 개국 당시 양주는 군에 해당하였는데 이후 1397년 양주부로 승격하였으며 1413년에는 도호부로 승격하였다. 1410년에는 목으로 승격하였는데, 1413년에 다시 도호부로 강등되었다. 이후 1466년 세조에 의해 다시 양주목으로 승격되었는데,1504년 연산군이 사냥터를 만든다는 이유로 양주목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중종반정이 일어난 후인 1506년 양주목이 복설되었다. 이후 조선 후기 고종 대에 갑오개혁으로 인하여 1895면에 23부제가 실시되면서 양주군을 재편될 때까지 양주목의 체제가 유지된다.

조선 시대 남양주의 인구수를 직접적으로 알기 어렵지만 양주목의 인구수를 통해 간접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따르면 양주에는 1,481호와 2,726명이 존재하였다고 한다. 또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따르면 양주목은 총 1만 2465호와 6만 425명의 인구를 보유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조선 전기에 비해 조선 후기에 양주목의 호구수가 10~30배 증가하였음을 의미한다. 특히 조선 후기 양주목의 호구수 규모는 경기 지역 안에서 수원과 함께 가장 큰 규모였다. 한편 고종 대에 편찬된 『양주군읍지(楊州郡邑誌)』에 따르면 당시 양주군의 호구수는 1만 2251호로 나타나는데, 이는 18세기 『호구총수』에 기록된 것과 근사하다. 즉 조선 후기 이후로는 호구수가 큰 증감 없이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추세는 양주에 속해 있는 남양주 지역의 호구수 추세와 유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양주 지역의 경제 역시 직접적으로 알 수 없지만 양주목의 경제 규모를 통해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데,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양주의 토지 전결이 간전(墾田) 1만 5190결로 나타난다. 1759년에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전답(田畓) 1만 160여 결, 실결수 3,013여결로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 말에 편찬된 『양주군읍지』에도 전답 1만 163여 결이 존재하지만 각종 면세결이 존재하고 있음이 나타난다.

한편 조선 시대의 문화유산으로 현대의 남양주에까지 전해지는 것으로는 남양주 홍릉과 유릉, 남양주 광릉 등 왕릉과 풍양궁지, 남양주 궁집, 석실서원지 등의 유적지 등이 있다. 또한 16세기에 형성된 집성촌이 현재까지도 맥락을 유지하고 있다.

[근대]

1910년 일제의 조선 강제 병합 이후 남양주 지역은 대대적인 개편을 맞이하였다. 당시 일제는 식민지 조선의 효과적인 지배를 위해 행정구역 개편을 도모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말 30개 면으로 구성되었던 양주군은 16개 면으로 축소되었다. 이로 인하여 남양주 지역에 해당하였던 행정구역이 개편되었는데, 양주군 미음면, 금촌면, 상도면 일부가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으로 합쳐졌고, 내동면, 별비면 일부, 노원면 불암리가 별내면으로 통합되었다. 또한 양주군 초부면, 와공면, 하도면 일부가 와부면으로 합쳐졌고, 진관면건천면진건면으로 통합되었다. 마지막으로 진벌면, 접동면, 별비면 일부가 진접면으로 합쳐졌고, 상도면 일부와 하도면이 화도면으로 통합되었다. 1914년에 형성된 경기도 남양주 지역의 면 단위 행정구역은 1945년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큰 변화가 없었다. 한편 일제 강점기 남양주 지역의 인구는 1925년 10월 1일 기준 8,114세대에 4만 4497명이었으며, 당시 주요 산업은 농업으로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였다.

일제 강점기 남양주 지역에서는 독립운동이 꾸준히 진행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에 남양주의 교회와 학교 등을 중심으로 독립 만세 운동이 진행되었다. 특히 애국계몽운동의 연장선에서 학교를 설립하는 교육 운동이 이루어졌다. 일찍이 남양주 지역에서는 개항기 때부터 궐리학교, 일성학교, 창신학교, 한동학교를 설립하여 애국계몽운동에 동참하였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는 각 지역에 초등 교육을 보급하는 정책과 남양주 지역의 교육열이 맞물려 1919년 금곡보통학교, 1922년 장현공립보통학교, 1924년 덕소공립보통학교, 1925년 마석심상소학교, 1934년 별내보통공립학교, 1934년 송촌간이학교, 1935년 진건공립심상소학교, 1938년 진건공립심상소학교, 1939년 조안공립심상소학교 등이 설립되었다.

한편 남양주 지역 출신으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는 소유지를 판매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이석영이 있다.

[현대]

일제로부터 해방 이후 6·25전쟁 동안 남양주는 남북한 간의 전투 지역이 되었다. 서울과 인접한 탓에 전쟁의 피해를 많이 받았는데, 6·25전쟁 발발 직후 북한군에 점령되어 타 지역에 비해 오랜 시간 북한군의 점령에 놓여 있었다. 전쟁이 끝난 이후 남양주 지역은 전후 복구 사업에 착수하였다.

한편 남양주는 1980년에 양주에서 분리되어 ‘남양주군’으로 독립하였다. 이때 남양주군은 2읍 6면으로 구성되었는데, 이후 남양주군 와부면이 와부읍으로 승격되고, 남양주군 구리읍이 구리시로 승격되어 분리되고, 와부읍 조안출장소가 조안면으로 승격되는 개편이 이루어졌다. 또한 미금읍이 미금시로 승격되어 분리되었고, 진접면이 진접읍으로 승격되었으며 퇴계원출장소가 퇴계원면으로 승격되었다. 1991년에는 화도면이 화도읍으로 승격되었고, 1995년에는 미금시가 폐지되고 남양주로 편입되면서 남양주는 군에서 시로 승격하였다. 또한 같은 해인 1995년에 진접 오남출장소가 오남면으로 승격하여 남양주시는 총 3읍 6면 6동으로 재편되었다. 남양주시로 승격된 후 2001년에는 진건면을 진건읍으로, 오남면오남읍으로 승격하였고, 2012년에는 별내동이 개청되었으며, 2019년에 퇴계원면이 퇴계원읍으로 승격되면서 6읍, 3면, 7동으로 재편되었다.

한편 남양주시에서는 모란공원을 조성하여 민주화 운동을 하였던 열사들을 추모하고 있으며, 각종 산업 개발과 신도시 개발을 통해 도시의 규모를 확장하는 한편 시민의 삶을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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