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415
한자 三·一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명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13일연표보기 - 3·1운동 경기도 남양주 지역에서 3·1운동 발생
전개 시기/일시 1919년 3월 13일~1919년 3월 14일 - 3·1운동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평내리에서 만세 시위
전개 시기/일시 1919년 3월 14일 - 3·1운동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에서 만세 시위
전개 시기/일시 1919년 3월 15일 - 3·1운동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에서 만세 시위 및 헌병주재소 습격
전개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 - 3·1운동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에서 만세 시위로 유혈 사태 발생
전개 시기/일시 1919년 3월 29일 - 3·1운동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퇴계원리에서 만세 시위
전개 시기/일시 1919년 3월 29일~1919년 3월 30일 - 3·1운동 경기도 양주군 진건면에서 만세 시위
전개 시기/일시 1919년 3월 31일 - 3·1운동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에서 만세 시위
전개 시기/일시 1919년 4월 8일 - 3·1운동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에서 헌병주재소 공격
종결 시기/일시 1919년 4월 8일연표보기 - 3·1운동 경기도 남양주 지역의 3·1운동 종료
발생|시작 장소 평내리 -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평내리
종결 장소 덕소리 -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덕소리
성격 독립운동
관련 인물/단체 김춘경|김원석|김필규|김현모|남궁우룡|나상규|손삼남|엄본성|이달용|이승익|이재일|이정성|전순만

[정의]

1919년 3월 1일 이후 경기도 남양주 지역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일어난 거족적인 독립운동.

[개설]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와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여 경성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는 조선인의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동시에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경기도 남양주 지역에서는 3월 13일부터 이틀에 걸쳐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현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도농동·호평동·평내동·일패동·이패동·삼패리 지역] 평내리에서 최초의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이를 기점으로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만세 시위의 불길은 유혈 사태를 빚은 1919년 3월 18일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현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마석우리의 만세 시위를 정점으로 차츰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고, 1919년 4월 8일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현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의 만세 시위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경기도 남양주 지역의 모든 면에서 전개된 만세 시위는 총 10회에 달하였다.

[역사적 배경]

3·1운동은 두 가지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하나는 조선인의 응축된 불만이다. 무단 통치가 상징하듯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일제는 조선인의 기본권을 철저히 억압하고 폭력적이고 차별적인 방식으로 조선인을 대우하였다. 특히 일제는 부족한 재원을 보충하기 위해 조세를 대폭 증징하고, 식민지 지주제를 강화하였다. 조선인의 삶은 나날이 피폐해졌다. 다른 하나는 민족 자결주의의 대두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국제 질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식민지 민족의 자결권을 주장하였고, 미국의 입장은 파리강화회의 때 결의 사항으로 채택되었다. 민족 자결주의는 조선인에게 독립에 대한 희망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경과]

경기도 남양주 지역에서 전개된 3·1운동의 양상을 시기·지역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양주군 미금면 평내리의 만세 시위를 주도한 인물은 이승익(李昇翼)이었다. 마을의 구장이었던 이승익은 경성에서 촉발된 만세 시위에 관한 소식을 듣고 1919년 3월 13일 주민을 소집하였다. 이 자리에 모인 100여 명의 주민들은 곧바로 만세 시위를 일으켰다. 미금면 평내리 주민 150여 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19년 3월 14일에 다시 집결하여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미금면 금곡리에 있는 면사무소를 향해 행진하였다.

둘째, 양주군 진접면[현 남양주시 진접읍]에서 처음으로 만세 시위가 일어난 시기는 1919년 3월 14일이었다. 진접면 장현리[현 진접읍 장현리]에 모인 70여 명의 주민들은 목청껏 조선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다음으로 1919년 3월 31일에는 이재일(李載日)과 전순만(全順萬)의 주도 아래 광릉천 모래밭에 200여 명의 대규모 군중이 집결하여 만세 시위를 펼쳤다.

셋째, 양주군 와부면에서는 김춘경(金春經), 김현모(金顯模), 이정성(李正成) 등의 주도 아래 1919년 3월 15일 이른 아침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와부면 송촌리[현 조안면 송촌리]와 조안리의 주민 500여 명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면사무소가 있는 와부면 덕소리로 행진하였고, 체포된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이어서 4월 8일에는 50여 명의 군중이 와부면 덕소리에 재집결하여 헌병주재소를 공격하였다.

넷째, 양주군 화도면에서는 이달용(李達鎔)을 중심으로 김원석(金元石), 김필규(金弼奎), 남궁우룡(南宮又龍) 등이 계획한 만세 시위가 1919년 3월 18일 밤 10시에 시작되었다. 1,000여 명에 달하는 대규모의 주민들은 검거된 인사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화도면 마석우리[현 남양주시 화도읍 마석우리]의 헌병주재소로 몰려가 격렬한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 헌병의 무자비한 발포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다섯째, 양주군 별내면[현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4동,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산곡리,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별내동·퇴계원읍 퇴계원리 지역]에서는 1919년 3월 29일 별내면 퇴계원리[현 경기도 남양주시 퇴계원읍 퇴계원리]에 약 200명의 주민들이 집결하여 만세 시위를 펼쳤다.

여섯째, 양주군 진건면[현 남양주시 진건읍]에서는 1919년 3월 29일 나상규(羅相奎), 손삼남(孫三男), 엄본성(嚴本成) 등을 필두로 진건면 오남리[현 오남읍 오남리] 주민 수십 명이 모여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다음 날인 1919년 3월 30일 밤에는 진건면 양지리에 10여 명이 집결하여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결과]

경기도 남양주 지역의 3·1운동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재판 기록에 의하면 만세 시위 과정에서 11명이 죽거나 다쳤고, 103명이 체포되었다. 이 가운데 54명이 즉시 기소되어 53명이 실형을 선고 받았다. 태형에 처해진 4명을 제외한 49명은 최소 징역 3개월부터 최대 징역 1년 6개월까지 옥고를 치렀다.

[의의와 평가]

경기도 남양주 전체 지역에서 일어난 3·1운동은 식민 지배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와 자주·독립의 열망을 표출한 사건이었다. 특히 유혈 사태가 발생한 현 남양주시 화도읍 지역의 만세 시위는 경기도 전역으로 3·1운동이 확산되는 데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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