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698
한자 金弼圭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조형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4년 1월 18일연표보기 - 김필규 출생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 - 김필규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에서 3·1운동 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 - 김필규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3·1운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김필규 투옥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25일 - 김필규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 선고
몰년 시기/일시 1919년 7월 27일연표보기 - 김필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9년연표보기 - 김필규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달전리 -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달전리
거주|이주지 화도면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지도보기
활동지 화도면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월산교회 목사

[정의]

경기도 남양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가계]

김필규(金弼圭)[1874~1919]는 1874년 1월 18일 경기도 가평군 군내면 달전리[현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달전리]에서 태어났다. 김필규가 양주군 화도면[현 남양주시 화도읍]으로 옮겨 온 것은 월산교회의 창립과 선교 활동 때문으로 추정된다.

[활동 사항]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일대를 포함하는 경기도 양주군 지역에서의 3·1운동은 각 면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중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에 해당하는 양주군 화도면 월산리에서 일어난 3·1운동은 비교적 초창기에 일어났고, 많은 사상자를 낳는 등 격렬한 만세 시위였다.

화도면 월산리의 3·1운동은 화도면[현 남양주시 화도읍]에 거주하던 이달용(李達鎔) 등의 주도 아래 준비되다가 1919년 3월 16일에 일본 경찰에게 사전 발각되었고, 이때 이택하(李澤夏), 이재하(李載夏), 이승보(李承輔) 등 다수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07년 설립된 월산교회와 배인학당에서 선교와 교육 양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고 있던 김필규는 전열을 정비하여 1919년 3월 18일로 거사일을 다시 정하고 독립 만세 시위를 조직하였다. 김필규는 서울에서 전개된 3·1운동의 소식을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시위를 준비하였다고 한다.

1919년 3월 18일 화도면 월산리와 답내리[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답내리] 주민이 총궐기하여 면사무소가 있던 화도면 마석우리[현 남양주시 화도읍 마석우리]로 행진하였다. 김필규는 주동자였던 만큼 헌병주재소 앞에서 이틀 전 시위 계획의 발각으로 체포된 이재하 등의 석방을 요구하며 독립 만세를 외쳤다.

행진을 시작할 때 200여 명에 불과하였던 시위 군중은 어느새 1,000여 명으로 늘어났고, 이에 일본 헌병대는 시위대를 향하여 총격을 가하며 독립 만세 운동을 탄압하였다. 일본 헌병대의 발포로 신영희(申榮熙), 손복산(孫福山), 이달용, 유상규(兪相奎), 이교직(李敎稙) 등 5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중상자도 다수 발생하였다.

1919년 3월 19일 새벽에는 김필규, 강선원(姜善遠), 윤준(尹俊), 김원석(金元石) 등 다수의 인사가 시위 주동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김필규는 1919년 4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았고, 이에 불복하여 항고하였으나 1919년 5월 24일 경성복심법원과 1919년 6월 21일 고등법원에서 모두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이후 옥중에서 심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1919년 7월 27일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3·1운동 만세 시위 현장에서 일제의 통치에 맹렬하게 저항하였던 김필규의 공훈을 기려 정부는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월산교회와 경기도 남양주시 차원의 추모 사업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답내리 월산교회 앞마당에 화도면 월산리 3·1운동에 참여한 김필규 등의 인물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1993년에 설립한 3·1운동 기념비가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 99번지에도 김필규를 비롯하여 화도면 일대의 만세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을 추모할 목적으로 3·1운동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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