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692
한자 金愚東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명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 - 김우동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에서 3·1운동 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 - 김우동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3·1운동 참여
활동지 화도면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3·1운동

[정의]

경기도 남양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가계]

김우동(金愚東)[?~?]은 1919년 3·1운동 당시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에 해당하는 양주군 화도면에 거주하였다.

[활동 사항]

3·1운동의 취지에 동조하는 동시에 정치 변혁을 추구하는 여러 인사들이 1919년 3월 16일 이달용(李達鎔)의 권유 아래 화도면 답내리에 있는 월산교회에 모여 만세 시위의 시기와 방법을 기획하였다.

김우동윤태익(尹泰益), 이달용, 이덕재(李德在), 이승보(李承輔), 이재하(李載夏), 이택주(李宅周), 이택하(李澤夏), 홍순철(洪淳哲) 등과 함께 모임을 조직하고 주도적으로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거사 날짜로 정하여진 1919년 3월 18일 밤 10시경 화도면 월산리와 답내리[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답내리] 주민을 중심으로 1,000여 명의 주민들이 화도면 마석우리[현 남양주시 화도읍 마석우리] 헌병주재소 앞에 집결하여 행진 도중에 체포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대대적인 만세 시위를 벌였다. 김우동 역시 만세 시위에 참석하여 있는 힘껏 소리 높여 “조선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점점 격화되어 가는 대규모 만세 시위의 기세를 꺾으려는 일본 헌병의 무자비한 발포로 5명이 현장에서 죽고 6명이 중상을 입는 유혈 사태가 발생하였는데, 김우동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고 귀가하였다.

1919년 3월 19일 일본 헌병이 만세 시위 가담자를 체포하기 위하여 화도면 일대에 출동하였을 때 김우동은 대다수의 주민들과 함께 미리 다른 곳으로 피신하여 연행되지 않았다. 그 결과 김우동은 실형을 선고받은 다른 주동자와 달리 옥고를 피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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