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742
한자 李德在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도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 - 이덕재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에서 3·1운동 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 - 이덕재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3·1운동 참여
출생지 화도면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지도보기
활동지 화도면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정의]

경기도 남양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이덕재(李德在)[?~?]는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에 해당하는 양주군 화도면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의 명의로 서울 파고다공원[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후 전국적으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경기도 남양주 지역에서는 1919년 3월 13일부터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다. 월산교회 목사인 김필규(金弼奎)이인하(李麟夏), 이택주(李宅周) 등과 함께 전국적인 만세 시위 소식을 듣고, 1919년 3월 16일 월산교회에서 마을 지도자인 이덕재를 비롯한 이달용(李達鎔), 이승보(李承輔), 이재하(李載夏), 이택주(李宅周), 유인명(柳寅明), 홍순철(洪淳哲), 윤태익(尹泰益) 등과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에 거사가 사전에 발각되면서 이재하, 이택하(李澤夏), 이승보가 검거되었다.

이에 1919년 3월 18일 화도면 월산리와 답내리[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답내리] 일대의 주민 200여 명이 모여 횃불을 들고 모란고개를 넘어 면사무소가 있는 화도면 마석우리[현 남양주시 화도읍 답내리]의 헌병주재소로 몰려갔다. 군중들은 검거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헌병주재소 앞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불렀다. 시위 참여 인원이 가장 불어난 새벽 시점에는 1,000여 명에 달하는 등 급격하게 시위대의 규모가 커지고 분위기도 격앙되었다. 일본 헌병대는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하여 발포하는 등 무력으로 대응하였다.

일본 헌병대의 시위 진압 과정에서 총에 맞은 이달용, 손복산(孫福山), 신영희(申榮熙), 유상규(兪相奎), 이교직(李敎稙) 등 5명은 현장에서 사망하였고, 원대현(元大鉉), 강덕여(姜德汝), 윤균(尹均), 윤정석(尹丁石), 이재혁(李載赫) 등이 중상을 입었다. 1919년 3월 19일 새벽에는 김필규를 비롯하여 강선원(姜善遠), 윤준(尹俊), 김원석(金元石) 등이 주동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고, 수사와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상훈과 추모]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답내리 월산교회 앞마당에 화도면 월산리 3·1운동에 참여한 이덕재 등의 인물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1993년에 설립한 3·1운동 기념비가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 99번지에도 이덕재를 비롯하여 당시 만세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을 추모하고자 3·1운동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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