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상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701
한자 羅相奎
영어공식명칭 Na Sanggyu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오남읍 오남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조형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3년 9월 28일연표보기 - 나상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29일 - 나상규 경기도 양주군 진건면 오남리 만세 시위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50년 6월연표보기 - 나상규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9년연표보기 - 나상규 대통령표창 추서
출생지 오남리 - 경기도 양주군 진건면 오남리[현 경기도 남양주시 오남읍 오남리]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3·1운동

[정의]

경기도 남양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나상규(羅相奎)[1873~1950]는 1873년 9월 28일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오남읍 오남리에 해당하는 경기도 양주군 진건면 오남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 당시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19년 3월 1일 경성부 인사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태화관에서 민족 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이후 독립 만세 운동의 열기는 전국으로 확산하였다.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일대를 포함하는 경기도 양주군도 당시 3·1운동이 활기차게 일어난 지역 중 한 곳으로, 3월 13일 이래로 4월 초순까지 20여 회에 달하는 독립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음을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중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은 3월 13일과 14일 양주군 미금면(渼金面) 평내리(坪內里) 만세 시위와 14일의 와부면(瓦阜面) 덕소리(德沼里)·진접면(榛接面) 장현리(長峴里)의 만세 시위, 15일의 와부면 송촌리(松村里)·덕소리·조안리(鳥安里) 일대에서 벌어진 만세 시위, 18일의 화도면(和道面) 마석우리(磨石隅里) 만세 시위, 29일의 별내면(別內面) 퇴계원리(退溪院里)·진건면(眞乾面) 오남리(梧南里)의 만세 시위, 30일의 진건면 양지리(陽地里) 만세 시위, 31일의 진접면 광릉천 만세 시위, 그리고 4월 8일의 와부면 덕소리 만세 시위이다. 나상규는 이 중 3월 29일의 현재의 남양주시 오남읍 오남리에 해당하는 양주군 진건면 오남리 만세 시위에 참여한 인물이다.

[활동 사항]

나상규는 1919년 3월 29일에 같은 마을 사람들인 엄본성(嚴本成)·이종갑(李鍾甲)·여원필(呂元弼)·권노적(權魯赤)·손삼남(孫三南)·한백석(韓白石) 등과 함께 수십 명의 군중을 이끌고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해당 시위는 일제에 의하여 해산되었고, 시위 후 체포된 나상규는 1919년 5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해당 판결문은 나상규가 “손병희(孫秉凞) 등의 조선 독립선언의 취지에 찬동하여 모두 정치 변혁의 목적으로, 1919년 3월 29일경 피고들의 거주지인 경기도 양주군 진건면 오남리[현 경기도 남양주시 오남읍 오남리]에서 수십 명의 군중과 함께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침으로써 안녕질서를 방해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나상규는 판결에 불복하여 다른 이들과 함께 공소하였으나 1919년 6월 21일 경성복심법원은 공소를 기각하였고, 이에 불복한 나상규가 다시 상고하였지만 7월 31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면서 결국 옥고를 치렀다.

나상규는 1950년 6월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나상규에게 2009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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