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익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753
한자 李昇翼
영어공식명칭 Lee Seungik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대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5년 12월 20일연표보기 - 이승익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 이승익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평내리 구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3일~1919년 3월 14일 - 이승익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평내리에서 3·1운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8월 18일 - 이승익 고등법원에서 징역 10개월 선고
몰년 시기/일시 1946년 12월 27일연표보기 - 이승익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5년연표보기 - 이승익 건국포장에 추서
출생지 평내리 -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3·1운동

[정의]

경기도 남양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이승익(李昇翼)[1875~1946]은 1875년 12월 20일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에 해당하는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평내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 당시 평내리 구장이었다.

[활동 사항]

1919년 경성의 3·1운동 소식을 들은 뒤, 구장 이승익(李昇翼)은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독립 만세 운동을 저지하기 위하여 배포한 고유문(告由文)을 낭독한다는 명분으로 1919년 3월 13일 박모 씨의 주막에 100여 명의 주민을 소집한 뒤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승익우보현(禹輔鉉)·이보영(李輔永)·정기섭(丁基燮)·김영하(金永夏)·이석준(李錫俊) 등과 함께 시위를 이끌어 나갔다. 다음 날인 1919년 3월 14일 100여 명의 시위대와 독립 만세 운동을 벌이며, 면사무소가 있는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금곡리[현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까지 행진하였다. 도중에 일본 헌병이 해산을 권유하였지만, 조선 독립 만세를 부름이 마땅하지 않느냐고 저항하며 독립 만세 운동을 계속하였다.

독립 만세 운동 이후 일본 경찰에 체포된 이승익은 주모자로 몰려 모친 고초를 겪었다. 1919년 5월 8일 경성지방법원은 「보안법」 위반을 이유로 이승익에게 징역 10개월, 우보현·이보영·정기섭·김영하·이석준에게 징역 6개월을 선고하였다.

이에 이승익우보현·이보영·정기섭·김영하·이석준은 공소하였지만 1919년 6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 기각 판결을 하였다. 이후 이승익우보현·이보영·정기섭·김영하·이석준은 다시 상고하였지만, 1919년 8월 18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판결을 하여 형이 확정되면서 복역하였다.

이승익은 1946년 12월 27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이승익에게 1995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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