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744
한자 李輔永
영어공식명칭 Lee Boyeong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도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0년 2월 12일연표보기 - 이보영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3일~1919년 3월 14일 - 이보영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평내리 만세 시위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55년 4월 10일연표보기 - 이보영 사망
출생지 평내동 -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3·1운동

[정의]

경기도 남양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이보영(李輔永)[1890~1955]은 1890년 2월 12일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에 해당하는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평내리에서 태어났으며, 1919년 3·1운동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다.

[활동 사항]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의 명의로 서울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후 전국적으로 만세 시위가 있었다. 양주군 미금면 평내리의 구장이었던 이승익(李承翼)은 서울에서 독립 선언을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만세 시위를 진행할 계획을 세웠다. 당시 전국 각지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나자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는 만세 시위의 기세를 저지하기 위한 고유문(告由文)을 전국적으로 배포하였는데, 3월 13일 미금면 평내리[현 남양주시 평내동] 구장 이승익이 고유문을 낭독한다는 명분으로 100여 명의 주민을 소집한 뒤 만세 시위를 벌일 당시 이보영도 참여하였다. 다음 날인 3월 14일 미금면 평내리 주민 150여 명이 다시 집결하여 만세를 부른 후 면사무소가 있는 양주군 미금면 금곡리[현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로 향할 당시에도 함께 행동하다가, 일제 헌병이 시위대를 제지하고 해산할 것을 요구하자 이에 적극 저항하였다. 이로 인해 이보영이승익·우보현(禹輔鉉)·정기섭(丁基燮)·김영하(金永夏)·이석준(李錫俊) 등과 함께 만세 시위 주도자로 체포되었다.

이후 이보영은 5월 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고, 이에 공소하였으나 6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8월 18일 고등법원에서도 기각됨에 따라 옥고를 치렀다. 이보영은 1955년 4월 10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이보영에게 199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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