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691
한자 金永夏
영어공식명칭 Kim Yeongha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조원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4년연표보기 - 김영하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3일~1919년 3월 14일 - 김영하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평내리·금곡리 만세운동 주도
추모 시기/일시 2011년연표보기 - 김영하 건국포장 추서
출생지 평내동 -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평내리[현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3·1운동

[정의]

경기도 남양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김영하(金永夏)[1884~?]는 1884년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에 해당하는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평내리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1919년 당시 경기도 양주군에서 발생한 최초의 독립 만세 시위였던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평내리[현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 만세 시위를 주도한 인물은 평내리의 구장(區長)으로 있던 이승익(李昇翼)이었다. 평내리에 거주하던 김영하는 구장 이승익의 연락을 받고 만세 시위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가하였다. 1919년 3월 13일 이승익의 소집에 따라 평내리의 주막이었던 박모 씨의 집 앞에 김영하를 비롯하여 우보현(禹輔鉉)·이보영(李輔永)·정기섭(丁基燮)·이석준(李錫俊) 등의 마을 주민들이 모여들어 인원이 100여 명에 달하였다. 군중은 곧 조선 독립 만세를 연호하며 마을을 행진하였다. 김영하이승익 등과 함께 선두에 서서 만세 시위 대열을 이끌었다. 다음 날인 1919년 3월 14일 오후 1시 같은 장소에 모인 150여 명의 군중들은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고, 면사무소가 있는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금곡리[현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까지 행진하였다. 시위대는 미금면 금곡리로 가는 두 번째 고개에서 200m 정도 내려간 곳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고, 이에 출동한 기마 헌병이 해산을 명령하였다. 하지만 “2,000만 동포가 조선 독립을 기뻐하며 만세를 부르는 것이 정당하지 않느냐”면서 시위를 계속하려 하자 김영하를 비롯한 이승익·이석준·우보현·정기섭·이보영 등 6명을 주동자로 체포하였다.

김영하는 1919년 5월 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았고, 이에 불복하여 공소하였으나 1919년 6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 판결을 받았다. 김영하는 재차 상고하였으나 1919년 8월 18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2011년 김영하에게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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