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 시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446
한자 三國 時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이종록

[정의]

고구려·백제·신라의 세 나라가 병립하였던 시기의 경기도 남양주 일대의 역사와 문화.

[개설]

삼국 시대(三國 時代)는 기원전 1세기 전후 성립한 고구려와, 마한과 진한의 소국 중 하나에서부터 마한과 진한의 소국들을 각각 병합하며 고대 국가로 성장한 백제와 신라가 병립하고 있었던 시기이다. 삼국 시대는 기원후 660년 백제의 멸망, 668년 고구려의 멸망과 신라의 삼국 통일까지 지속되었다. 오랜 기간 대중적으로 ‘삼국 시대’라는 용어는 고조선 멸망 이후 1세기부터 7세기 중반까지 한국 고대 전체와 동의어로 사용되어 왔으며, 이러한 인식은 김부식(金富軾)이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역사관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더욱 엄밀한 기준을 적용하는 학계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가 모두 율령제(律令制)를 갖춘 중앙 집권적 국가인 ‘고대 국가’의 단계로 진입한 4세기를 삼국 시대의 시작으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삼국 시대의 종말은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까지로 보아야 함은 이견이 없으나, 고조선 멸망 이후부터 역사상에는 가야를 포함하여 부여, 삼한 등의 여러 국가가 병존했으며, ‘삼국’이라는 용어 그대로 한국사에서 3개의 국가만이 존재했던 시기는 가야가 멸망한 6세기 중반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가야를 포함하여 ‘사국시대’로 부르거나, 부여를 포함한 ‘오국시대’, 혹은 삼국 외에 주변 국가들을 아울러 ‘열국시대’로 칭해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되는 등 용어에 대한 논란이 많다.

삼국 시대는 고구려·백제·신라가 모두 일정 수준의 국가적 체제를 정비하고, 주변 집단에 대한 활발한 정복 전쟁을 수행하였던 시기이다. 삼국 시대가 시작된 4세기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각각 중국 군현인 낙랑군과 대방군의 고지를 점령하며 양자가 이 일대를 두고, 이후에는 백제가 오랜 기간 점유하고 있었던 한강 유역을 두고 격심하게 대립하였다. 이후 신라의 성장에 따라 삼국은 서로 전쟁을 벌이거나 혹은 동맹을 맺기도 하는 방식으로 경쟁하였으며, 이는 7세기 신라의 삼국 통일로 끝을 맺게 되었다. 남양주 일대는 이러한 삼국의 대립에서 주요 각축장이었던 한강 유역에 위치하여 고구려와 백제, 신라 모두 일정 기간 점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남양주 지역은 삼국 간의 전쟁의 무대이기도 하였지만, 이와 함께 다양한 인적·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지역이기도 했을 것이다.

[삼국 시대 남양주의 연혁]

본래 남양주 일대는 마한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마한 내에서 백제의 성장에 따라 4세기 이전까지 남양주 지역은 자연 백제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세기 무렵 고구려는 광개토왕의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남쪽의 백제와 잦은 각축을 벌였으며, 남양주가 위치하였던 한강 유역과 그 주변은 두 나라의 주요 전장이었다. 「광개토왕비」에 따르면 396년 광개토왕이 백제를 정벌하며 다수의 성을 점령하였는데, 당시 점령한 성들 중 고리성(古利城)이 있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는 남양주가 고구려에서 골의노현(骨衣奴縣)으로 불렸다고 하는데, 고리(古利)와 골의(骨衣)의 음운상의 유사성을 들어 곧 광개토왕 대에 백제로부터 탈취한 고리성을 해당 지역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에 따른다면, 남양주 일대는 백제가 점유하던 시기 ‘고리성’이라는 성이 설치되었으며, 이후 4세기 말 고구려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신라의 성장에 따라 한강 유역은 고구려와 이에 대항하여 나제동맹을 맺은 백제·신라와의 전장이 되었으며, 이후에는 한강 유역을 두고 백제와 신라가 서로 경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경쟁에서 승리한 신라는 553년(진흥황 14) 백제로부터 한강 유역을 빼앗아 일대에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는데, 남양주 지역 또한 당시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에서는 신주를 557년에 북한산주(北漢山州), 568년에 남천주(南川州), 그리고 604년(진평왕 26)에 다시 북한산주로 고친 후 한산주(漢山州)로 개명하였다. 그리고 약 1세기 이후 757년(경덕왕 16)에 구주 전체에 대한 명칭 변경이 있었으며, 이때 한산주는 한주라는 이름으로 처음 칭해지게 되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골의노현은 당시 한주에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후에는 한양군(漢陽郡)에 속하였고 명칭도 황양현(荒壤縣)으로 변경되었다. 곧 남양주 일대는 신라가 신주를 설치한 6세기 중엽 어느 시기부터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되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외에 남양주 일대에 관한 삼국 시대의 연혁이나 관련 고고학 자료는 많지 않지만, 남양주 지역의 지정학적인 중요성을 감안한다면 향후 조사에 따라 한층 다양한 면모를 드러낼 가능성이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당시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유적으로는 불암산성이 있으며, 불암산성은 축성 기법이나 발견된 토기로 보아 삼국 시대 신라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 이에 대한 역사적 증거는 없지만, 남양주의 퇴뫼산에 위치한 퇴뫼산성은 고구려 장수인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쌓았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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