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469
한자 南楊州 思陵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능묘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 107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민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440년 - 정순왕후 출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521년 - 정순왕후 사망
조성 시기/일시 1521년연표보기 - 남양주 사릉 조성
문화재 지정 일시 2009년 6월 30일연표보기 - 남양주 사릉 사적 제209호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남양주 사릉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사적 지정 번호와 서울특별시 기념물 지정 번호 삭제
현 소재지 남양주 사릉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 107 지도보기
성격
관련 인물 정순왕후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리에 있는 조선 단종의 비 정순왕후의 능.

[개설]

남양주 사릉(南楊州 思陵)은 정순왕후(定順王后) 여산 송씨(礪山宋氏)[1440~1521]의 능으로, 정순왕후는 조선 제6대 국왕 단종(端宗)[재위 1452~1455]의 비이다. 정순왕후는 1454년 왕비에 책봉되었으나 1457년 단종이 선위(禪位)하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자 함께 강등되었다. 정순왕후는 평생 단종을 섬기었는데 말년을 단종의 유일한 조카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정미수(鄭眉壽)[1456~1512]의 집에 의탁하여 살았다. 그래서 정순왕후는 사망 후 정미수해주 정씨(海州 鄭氏) 선산에 묘(墓)가 조성되었다. 1698년 단종과 정순왕후는 복위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정순(定順)’, 휘호(徽號)는 ‘단량 제경(端良齊敬)’이며, 묘는 봉릉(封陵)되어 ‘사릉’이라고 하였다. 이때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남양주 사릉은 2009년 6월 30일 사적 제209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위치]

남양주 사릉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 107번지에 있다.

[변천]

1698년 9월 30일 신규(申奎)[1659~1708]가 상소하여 노산군의 복위를 주장하자 10월 23일 종친, 문무관 496인이 헌의(獻議)하여 10월 28일 복위가 결정되었다. 10월 29일 복위, 부묘(祔廟), 봉릉도감의 설치 명령이 내려졌으며, 봉릉도감(封陵都監)의 도제조(都提調) 판중추부사 최석정(崔錫鼎)[1646~1715]을 비롯하여 인원이 결정되었다. 11월 6일 단종과 정순왕후의 시호(諡號), 휘호(徽號), 능호(陵號)가 결정되었다. 능역은 1699년 2월 완료되었으며, 혼유석 하전석 왼쪽에 ‘사릉 계좌정향 원경이십오척 고구척 숭정기원후칠십이년기묘이월이십일추봉(思陵 癸坐丁向 圓徑二十五尺 高九尺 崇禎紀元後七十二年己卯二月二十日追封)’이라는 각석(刻石)을 매안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

[형태]

남양주 사릉 봉릉 시 석물의 체제(體制)는 후릉(厚陵)을 따르고 수(數)는 경릉(敬陵)을 따른다고 하였다. 남양주 사릉 석물과 비교하여 보면 석물의 종류는 경릉, 크기는 후릉을 따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남양주 사릉은 병풍석, 난간석이 없는 단릉(單陵)으로 주변에 양석 1쌍, 호석 1쌍이 배치되어 있으며, 앞으로 망주석, 석상[혼유석], 장명등, 문인석과 석마가 건립되어 있다. 일반적인 왕릉에 비하여 양석, 호석의 수량이 절반이며, 무인석이 설치되지 않은 것은 세자묘(世子墓)로 조성된 경릉을 따랐기 때문이다. 능강 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홍살문이 건립되어 있으며, 『춘관통고(春官通考)』에서는 전사정(典祀廳), 제기고(祭器庫), 안향청(安香廳), 재실(齋室)이 있었다고 하는데 재실은 현존하고 있다. 비각 내에 있는 표석은 1771년 건립되었다. 또한 ‘노산군부인 송씨지묘(魯山君夫人 宋氏之墓)’라고 새겨진 옛 비석과 문인석 1쌍, 장명등 1쌍도 있었으나 원릉(園陵) 제도에 맞지 않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옛 석물들은 남아 있지 않다.

1698년 단종과 정순왕후가 복위되고, 각 묘소는 1699년 봉릉이 완료되어 왕릉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왕릉 내에는 민묘(民墓)가 있을 수 없기에 해주 정씨는 선산을 옮겨야 할 상황이었지만 숙종(肅宗)은 해주 정씨의 의리를 생각하여 존치시켰다. 그래서 현재 남양주 사릉 서쪽 언덕에 정미수 일가의 묘소가 보존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남양주 사릉은 숙종의 왕릉 석물 간소화 정책이 시작된 중요한 곳으로 석물의 크기가 줄어들면서 석재의 채취, 운반, 조각 등 제반의 인력과 물자가 줄어든 것을 알 수 있다. 심각한 전염병과 기근의 영향으로 석물의 크기를 줄였다는 의견도 있다. 남양주 사릉을 조성할 때 석재를 채석한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의 사릉 석물 채석장 터[思陵石物採石場址]가 2019년 8월 8일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되어 사릉은 연구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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