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양궁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496
한자 豊壤宮址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1로59번길 24[내각리 723-21] 일대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홍민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419년연표보기 - 풍양궁지 건립
폐지 시기/일시 1592년~1598년 - 풍양궁지 임진왜란으로 풍양궁 소실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55년 - 풍양궁지 유지비 건립
소재지 풍양궁지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1로59번길 24[내각리 723-21] 일대지도보기
성격 이궁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에 있었던 조선 시대 이궁 터.

[개설]

풍양궁지(豊壤宮址)는 유사시 왕이 피방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세종 초 태종의 주도로 조성된 이궁(離宮)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연희궁·남쪽의 낙천정·북쪽의 장위동 본궁과 함께 한양의 동편에 조성되었다.

[변천]

1419년(세종 1) 11월 부엉이가 울었던 일로 당시 상왕이었던 태종은 피방을 위한 이궁 조성의 뜻을 전한다. 태종이 친히 풍양과 포천 등지를 살핀 결과 풍양현의 옛 읍치 자리가 이궁지로 낙점되었다. 12월 박자청(朴子靑)[1357~1423]의 감독 아래 본격적으로 풍양궁의 수축이 시작되었으며 태종 역시 역사에 특히 신경을 써 자주 행차하였다. 1420년(세종 2) 1월 침전이 완공되었고, 6월 휴식 공간 수각(水閣)을 만들었다. 수각은 15명 내외가 앉을 수 있는 규모였다. 1421년(세종 3)부터는 소나무를 심도록 하는 등 주변 조경 사업이 진행되었다.

일단의 완성을 이룬 풍양궁은 조성 이후 피방처이자 태종의 거처로 활용되었으며, 사냥터 혹은 왕의 휴식처로도 쓰였다. 하지만 태종 사후에는 경복궁 주변에도 궁궐이 많이 조성되면서 상대적으로 거리가 먼 풍양궁의 관리는 수직관리만을 두는 등 다소 소홀해졌다. 본래 의도하였던 용도와는 달리 강무 시 혹은 사냥 시에 풍양궁 및 인근을 활용하는 양상이 간간이 확인될 뿐이다. 특히 연산군은 자주 풍양궁 주변에서 사냥하였으며, 1504년(연산군 10)에는 아예 주변 인가를 모두 철거하고 금표(禁標)의 범주 안에 넣어 일대를 사냥터로 만들기도 하였다. 이후 임진왜란을 겪으며 풍양궁도 소실된 것으로 여겨진다. 1755년(영조 31) 궁터에 비가 세워졌다. 영조가 선릉(先陵)을 알현하고 풍양에 거처하려 하였는데, 구궐터에 표식이 없는 것을 보고 세우도록 명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비에는 태종이 아니라 태조가 머무르던 구궐이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따라서 현재의 비각 위치는 태조가 잠시 거처하였던 곳이고 풍양궁은 별도의 공간에 있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위치]

풍양궁지의 위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723-21번지 일원으로 추정된다.

[현황]

풍양궁지는 현재 정면 2칸, 측면 1칸의 단측 팔작와옥 형태의 비각이 있어 옛 궁지였음을 표시하고 있다. 비각 자체는 헐렸다가 6·25전쟁 후 전주 이씨 중종에서 재건하였다. 비각 안에 비 2개가 남아 있다. 하나는 1755년 세운 것으로 높이 1.96m, 너비 47㎝이며 민무늬 대석에 대리석 비신, 팔작지붕 지붕돌로 되어 있다. 앞면에 ‘태조대왕재상왕시구궐유지 황명숭정기원후삼을해신춘 화정우차 배수경서 영기영수석(太祖大王在上王時舊闕遺址 皇明崇禎紀元後三乙亥伸春 畫停于此 拜手敬書 令畿營竪石)’이라고 새겨져 있다. 다른 하나는 1905년 세워진 것으로 높이 2.51m, 너비 61㎝이다. 앞면에 ‘태조고황제소어구궐유지(太祖高皇帝所御舊闕遺址)’, 뒷면에 ‘광무구년을사추배경서령부수(光武九年乙巳秋拜敬書令部竪石)’라고 새겨져 있다. 비각 앞에는 하마비가 있는데 장방형 대석으로 되어 있으며,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고 새겨져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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