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완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679
한자 姜完洙
이칭/별칭 강완주(姜完珠)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태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2년연표보기 - 강완수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29일 - 강완수 이순재, 김성암, 김석로 등 선언서 인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29일 밤 오후 9시~1919년 3월 30일 오후 5시 - 강완수 선언문 배포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31일 - 강완수 진접면 부평리 광릉천 일대에서 만세 시위 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5월 19일 - 강완수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선고
활동 시기/일시 1919년 7월 10일 - 강완수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8개월 선고
활동 시기/일시 1919년 9월 11일 - 강완수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
추모 시기/일시 1995년연표보기 - 강완수 대통령 표창 추서
출생지 강완수 출생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거주|이주지 봉선사 금원각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지도보기
활동지 강완수 활동지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승려

[정의]

경기도 남양주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강완수(姜完洙)[1892~?]는 1892년 경기도 경성부 사직동[현 서울시 종로구 사직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해당하는 양주군 진접면 부평리 봉선사의 승려였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 각지에 확산되자, 봉선사 승려들은 진접면[현 남양주시 진접읍]·미금면[현 남양주시 금곡동, 도농동, 호평동, 평내동, 일패동, 이패동, 삼패동] 일대에서 3·1운동의 취지를 선전하고, 다수의 사람을 결속하여 운동을 일으킬 계획을 수립하였다. 강완수는 1919년 3월 29일 승려 이순재·김성암과 약종상 김석로 등과 함께 선언서를 작성하는 작업에 참가했다. 강완수는 선언문 200매를 등사판을 이용하여 인쇄하였고, 1919년 3월 29일 밤 오후 9시 경부터 1919년 3월 30일 오후 5시 경까지 진접면 진벌리[현 남양주시 진접읍 진벌리]와 경기도 미금면 중촌리[현 남양주시 다산2동] 2개 리의 민가에 선언문을 배포하였다. 그런데 선언문 배포 전에 김석로가 자수하고, 선언문 작성에 대해서 공술함으로써 강완수김성암·이순재는 선언서 작성 및 배포의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7월 10일 경성복심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강완수 등이 작성한 선언문에는 ‘조선 독립단 임시 사무소’ 명의로 “현재 파리강화회의에서는 12개국을 독립시키기로 결정함으로써 조선도 이 기회에 극력 소요를 계속하여 독립의 목적을 달성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다. 이렇게 작성된 선언문은 1919년 3월 31일 진접면 부평리[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광릉천 일대의 만세 시위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체포 후 강완수는 1919년 5월 19일 경성지방법원 제1심에서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 받았다. 강완수는 이에 불복해 항소하였고, 1919년 7월 10일 경성복심법원 제2심에서 징역 8개월로 감형 받았다. 이후 강완수는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1919년 9월 11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됨으로써 옥고를 치렀고, 이후 행적은 알 수가 없다.

[상훈과 추모]

강완수는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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