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704
한자 朴景植
영어공식명칭 Park Gyeongsik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조형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2년 10월 7일연표보기 - 박경식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4일~1919년 3월 15일 - 박경식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3·1운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25일 - 박경식 「보안법」 위반 혐의로 8월 형 선고
활동 시기/일시 1920년 3월 - 박경식 출소
추모 시기/일시 2011년연표보기 - 박경식 건국포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2011년 - 3·1의거 애국선열 추념탑 및 용진 3·1의거 기념비 건립
출생지 송촌리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지도보기
활동지 송촌리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지도보기
활동지 덕소리 -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지도보기
활동지 조안리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조안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3·1운동

[정의]

경기도 남양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박경식(朴景植)[1882~?]은 1882년 10월 7일 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에 해당하는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송촌리에서 태어났으며, 농업에 종사하였다.

[활동 사항]

경기도 양주군3·1운동은 각 면 단위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 가운데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에 해당하는 양주군 와부면 송촌리·덕소리 일대의 독립 만세 시위는 1919년 3월 15일에 일어났다. 서울에서 3·1운동이 시작되고 「독립선언서」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이정성(李正成)[1878~1948]·김춘경(金春經)[1894~1952]·김현모(金顯模)[1878~1938] 등이 독립 만세 시위를 사전에 계획하였다. 이정성 등은 용진교회(龍津敎會)의 기독교인들로서, 용진교회가 1914년 설립한 사립 경진학교(敬進學校)의 교사·학생들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고 거사를 준비하였다.

주동자들은 1919년 3월 15일 아침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송촌리 마을 주민들을 집결시키는 한편, 시위 대열을 이끌 적극 가담자들을 규합하여 나갔다. 그리고 이정성 등은 시위 대열을 이끌고 사전 제작한 태극기를 앞세운 채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송촌리를 비롯한 인근 지역에서 주민 100여 명을 규합하여 김덕여(金德汝)[1875~1937] 등과 함께 태극기를 들고 독립 만세를 부르면서 와부면 덕소리[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를 향하여 행진하였다.

시위 행렬이 와부면 조안리[현 남양주시 조안면 조안리]에 이르렀을 때 박경식은 시위 대열에 합류하여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위에 적극 동참하였다. 독립 만세 운동은 시위가 전개될수록 점차 격렬해졌으며, 시위대는 일제 침략의 말단 기구인 헌병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그러자 일본 헌병은 시위대에 대한 발포로 탄압하였다.

시위 이후 박경식이정성 등과 함께 체포되어 1919년 4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8월 형을 선고받았다. 법정에서 박경식은 당일 시위에 가담하지 않았는데 헌병 주재소에서 폭행에 못 이겨 만세를 불렀다고 거짓 자백할 수밖에 없었다며 무죄임을 호소하였다. 함께 구속된 17인과 한꺼번에 상고하였으나 1919년 5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고, 1919년 7월 5일 고등법원에서도 기각되어 8개월 형이 확정되었다. 박경식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뒤 1920년 3월 출소하였다.

[상훈과 추모]

박경식에게 2011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와부면 송촌리에서 시작된 독립 만세 운동과 여기에 참여한 박경식 등의 인물을 추모하기 위하여 1994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3·1의거 애국선열 추념탑과 용진 3·1의거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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