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736
한자 李光洙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도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2년 2월 1일연표보기 - 이광수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5년 - 이광수 일본 유학
활동 시기/일시 1910년 - 이광수 오산학교 교사
활동 시기/일시 1917년 1월 - 이광수 『매일신보』에 『무정』 연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이광수 2·8독립선언서 작성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이광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이광수 『독립신문』 발간
활동 시기/일시 1921년 3월 - 이광수 귀국
활동 시기/일시 1922년 5월 - 이광수 ‘민족개조론’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26년 - 이광수 수양동우회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40년 2월 - 이광수 가야마 미츠로[香山光郞]로 창씨개명
활동 시기/일시 1941년 8월 - 이광수 임전대책협의회 발기인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41년 12월 - 이광수 조선임전보국단 전시생활부장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43년 4월 - 이광수 조선문인보국회 이사·평의원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45년 2월 - 이광수 대화동맹 준비 위원 겸 이사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45년 6월 - 이광수 조선언론보국회 명예 회원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45년 6월 - 이광수 대의당 위원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45년 7월 - 이광수 『매일신보』에 「소개기(疏開記)」 투고
활동 시기/일시 1946년 9월 2일 - 이광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에서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로 이주
활동 시기/일시 1946년 - 이광수 광동중학교 교사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47년 - 이광수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서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로 이주
활동 시기/일시 1948년 12월 - 이광수 『나의 고백』 출간
활동 시기/일시 1948년 - 이광수 『돌베개』 출간
활동 시기/일시 1949년 2월 - 이광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
활동 시기/일시 1949년 8월 - 이광수 불기소 처분
활동 시기/일시 1950년 - 이광수 6·25전쟁으로 납북
몰년 시기/일시 1950년 10월 25일연표보기 - 이광수 사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2년 - 『이광수전집』(삼중당) 총 20권 출간
추모 시기/일시 1976년 - 춘원 이광수 기념비 건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9년 - 『이광수전집』(우신사) 총 11권 출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9년 - 『이광수전집』(태학사) 총 30권 출간
출생지 정주군 - 평안북도 정주군
거주|이주지 사능리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 520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봉선사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지도보기

[정의]

일제 강점기 경기도 남양주에 은거한 문인.

[개설]

이광수(李光洙)[1892~1950]는 평안북도 정주군 출신이다. 1905년 일진회의 추천을 받아 일본에서 유학하였다. 1910년 귀국하여 당시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의 오산학교 교사가 되었고, 1911년에는 중국 상하이[上海]를 거쳐 미국으로 가려고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1919년 일본 유학 당시 2·8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고,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을 발간하였다. 1921년 3월 국내로 귀국한 뒤 1926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발족에 참여했다. 그러나 일제가 민족주의 운동의 뿌리를 뽑으려는 목적 아래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을 일으키면서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뒤부터 일제와 타협하였다.

일제가 침략 전쟁을 일으키자 이광수는 조선문인협회 회장으로 일제의 전쟁 수행을 위한 활동에 적극 동참하였다. 1940년 2월에는 가야마 미츠로[香山光郞]로 창씨개명을 하였고, 1941년 8월 임전대책협의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1941년 12월에는 조선임전보국단 전시생활부장으로 각종 강연회에서 연설을 하였다. 1943년 4월에는 조선문인보국회 이사·평의원 등으로 일제의 침략 전쟁을 위한 활동을 하였으며, 1945년 2월 대화동맹 준비 위원 겸 이사가 되었고, 1945년 6월에는 조선언론보국회 명예 회원과 대의당 위원이 되었다.

[활동 사항]

이광수는 일제 말기에 서울을 떠나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에 해당하는 양주군 진건면 사능리 520번지로 이주하였다. 이광수의 참회기인 『나의 고백』에 의하면, “나는 아내에게 져서 양주 사릉에 조그마한 집 한 간을 지었다. 나는 이 속에 누워 세상에서 숨어 버리려 하였던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이광수가 ‘은거’를 선택했음을 뜻한다. 이광수는 1944년 3월 사능리사릉 지역에 땅을 사서 농막을 짓고 농사를 지었는데, 이유는 이광수의 고향 친족이자 당시 봉선사 주지로 있던 ‘운허(耘虛)’라는 법명의 이학수(李學洙)의 존재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이광수사능리에 처음 이주했을 때 식량 자급이 불가능하자 봉선사에 있던 이학수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사능리에서의 생활을 이어 가던 이광수는 1945년 8월 16일 아침 이학수를 통해 일제가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1946년 9월 2일에는 이학수의 초청으로 사능리를 떠나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해당하는 양주군 진접면 부평리의 광릉 일대에 있는 봉선사에 신설된 광동중학교의 교사로 취임하여 1946년 겨울 학기 동안 교사로 근무하였다. 이광수봉선사의 ‘다경향실(茶經香室)’이라는 편액이 걸린 방에서 지냈다. 이광수는 ‘다경향실’에서 아침에 차를 마신 뒤 향불을 피우며 염불하고 사찰 경내나 주변의 산천을 걷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이러한 행보에 대해 이광수는 『나의 고백』을 통해 “내가 사릉 집도 버리고 양주 봉선사로 간 것은 아주 산중에 숨어 버리자는 결심에서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광수는 1947년 다시 사능리로 돌아와서 농사와 저술을 병행하며 생활하다가, 1949년 2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으나 1949년 8월 불기소 처분되었다. 이후 1950년 6·25전쟁으로 인해 납북되었고, 1950년 10월 25일 사망하였다.

이광수의 행적은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고, 『친일인명사전』에도 수록되었다.

[저술 및 작품]

이광수는 1917년 1월부터 『매일신보』에 장편 소설인 『무정』을 연재하였는데, 『무정』은 우리나라 최초의 장편 소설이라는 의의가 있다. 귀국 후인 1922년 5월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였고, 『동아일보』에 『마의태자』·『단종애사』·『이순신』·『흙』 등의 소설을 연재하였다.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거주할 당시의 저술 및 작품의 경우, 우선 사능리로 은거한 이후 경험한 농촌 생활에 대한 글인 「소개기(疏開記)」를 1945년 7월 『매일신보』에 6회 투고하였다. 이광수는 해방 이후 4년 반 동안 사능리사릉 지역, 그리고 부평리 광릉 지역의 봉선사 등지에서 생활하며 글을 썼다. 이 시기 이광수는 『도산 안창호』를 출간하는 한편, 수필집인 『돌베개』와 소설 『꿈』을 간행하였다. 이 중 1948년 출간된 『돌베개』는 이광수부평리봉선사에 체류하기 시작한 1946년 9월부터 다시 사능리사릉 지역으로 돌아간 이후인 1948년 2월까지의 생활을 기록한 것으로, 해당 지역에서 겪은 농촌 생활을 잘 보여 준다. 그리고 1948년 12월 참회기 『나의 고백』을 출간하였다.

이광수 사후에는 『이광수전집』이라는 이름으로 이광수의 여러 문학 작품을 집대성하는 작업이 이루어져 삼중당에서 1962년부터 총 20권 분량으로, 우신사에서 1979년부터 총 11권 분량으로, 그리고 태학사에서 2019년부터 총 30권 분량으로 출간되었다.

[묘소]

이광수의 묘소는 북한의 재북인사릉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76년 이광수의 부인 허영숙, 봉선사 주지로 이광수의 친척 동생이었던 승려 운허이광수의 유족들의 주도 하에 건립된 춘원 이광수 기념비봉선사 경내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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