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병자호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466
한자 丙子胡亂
영어음역 Byeongja Horan
영어의미역 Manchu Invasion of 1636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주명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의병
발생(시작)연도/일시 1636년 12월 2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637년 1월 30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전라북도 고창군
관련인물/단체 정홍명|유동휘|유철견|박기호|조첨|유여해|유지태|강시언|유용룡|김공립|정호례|이창문

[정의]

1636년 청나라의 조선 침략으로 발생한 전쟁.

[역사적 배경]

1627년(인조 5) 후금이 조선을 침입했을 때 조선은 무방비 상태로 당함으로써 후금에 대해 형제의 맹약을 하면서 일단락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선의 여론은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치자는 척화배금(斥和排金)[후금에 대하여 화의를 반대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났다.

당시 후금은 만주의 대부분을 석권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 부근까지 공격하면서 정묘호란 때 맺은 ‘형제의 맹약’을 ‘군신(君臣)의 의(義)’로 개약(改約)하자고 요청할 뿐 아니라, 황금·백금 1만 냥, 전마(戰馬) 3,000필 등 종전보다 무리한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3만 명까지 요구해 왔다. 1636년(인조 14) 2월에는 용골대(龍骨大)·마부태(馬夫太) 등이 후금 태종(太宗)의 존호(尊號)를 조선에 알림과 동시에 인조 비 한씨(韓氏)의 문상(問喪)차 조선에 사신으로 왔는데, 그들이 군신의 의를 강요해 조선의 분노는 폭발하게 되었다.

조선의 동정이 심상하지 않음을 알아차린 그들은 일이 잘못되었음을 간파하고 민가의 마필을 빼앗아 도주하였는데, 도망치면서 조정에서 평안도관찰사에게 내린 유문(諭文)을 빼앗아 본국으로 가져가게 되었다. 이 일로 조선이 후금에 대한 태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 그들은 재차 조선을 침입할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같은 해 4월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치고 12월 2일 태종이 10만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 와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경과]

정묘호란에 이어 다시 병자년에 오랑캐가 쳐들어오자 고창의 선비들은 의병을 모집하여 투쟁하였다. 남한산성에 있는 인조는 교서를 내려 8도의 백성들이 일어나 싸울 것을 명하였다. 1636년 12월 25일 전라도 여산에 모의청(募義廳)을 세우고 의병을 모으는 창의 격문이 각 고을에 나붙었다. 전라도의 호소사(號召使)로 임명된 정홍명(鄭弘溟)을 의병장으로 삼아 전라도 사람들이 다시 일어났다.

고창에서도 도유사와 유사를 정하여 군량·무기·전마 등을 모아 모의청으로 보내는 한편, 의병들이 의병장 정홍명을 따라 북상하였으나 왕이 삼전도에서 굴욕적으로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탄식하며 귀향하였다. 고창 지역에서는 고창의 유동휘·유철견·박기호·조첨·유여회·유지태와 무장강시언·유용룡·김공립, 흥덕의 정호례·이창문 등이 활약하였다.

[결과]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의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함으로써 병자호란을 끝이 나고 의병들은 모두 해산하였다.

[의의와 평가]

고창은 임진왜란·정유왜란과 정묘호란·병자호란, 그리고 이괄의 난을 맞아 한결같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떨치고 일어나 싸운 대표적인 고장이다. 고창의 자랑스러운 맥을 길이 보전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